실크로드에 서린 조선족 예술혼-韓樂然 유작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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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KBS문화사업단과 북경 중국미술관의 공동주최로 9월2~12일예술의 전당 한가람미술관 제4전시실에서 열리는 「실크로드에 담긴 조선족 예술혼-비운의 천재화가 韓樂然 遺作展」이 바로 화제의 전시회.
항일운동에 생애를 바친 애국자이며 그 시대 한국출신으로서는 드물게 프랑스에 유학,유럽의 인상주의 화풍을 소개했던 韓樂然의예술세계가 첫선을 보이는 이 전시회에는 수채화 32점과 유화 37점이 출품된다.
韓樂然은 1898년 중국 吉林省 龍井에서 태어났다.그의 부모는 조선조 말엽 생활고를 이기지 못해 신천지를 찾아 연변지구로옮겨왔던 것으로 전해진다.일찍부터 그림에 재질을 보였던 그는 궁핍한 가정생활로 인해 국민학교를 마친후 전화교 환수로,전차매표원으로,식자공으로 전전해야만 했다.
그가 처음으로 정식 그림수업을 받게된 것은 상해미술전문학교에입학하면서부터.1926년 渡佛이후 리옹에서 니스로,다시 파리로옮겨진 유학생활에서 그는 굶기를 밥먹듯하며 헐벗고 곤궁한 생활에 시달리면서도 한시도 화필을 놓지 않았을 정 도로 예술에 대한 집념은 확고했다.
루브르예술학원 졸업후 유럽화단의 인정을 받으며 작가로서의 위치를 다져나가기 시작한 그는 이후 네덜란드.스위스.소련.영국.
이탈리아등 유럽 일대를 무대로 작품전을 열때마다 호평을 받았다. 1937년 귀국한 그는 이후 항일투쟁에 뛰어들어 동북항일구국총회를 창립하는등 활발한 활동을 벌였는데 당시 그는 항일운동잡지의 표지 그림을 그려주기도 하고 선전대의 가두선전을 돕기 위해 화가 우환비와 함께 커다란 유화를 그려 거리에 걸어놓기도했었다. 그의 이같은 혁명가적 미술활동은 일반인에게 큰 영향을주었던 것으로 평가된다.
그의 작품에서 기념비적인 업적으로 평가되는 벽화묘사 작업은 1945년 돈황 막고굴 천불동 벽화에서부터 시작된다.돈황에는 수백개의 동굴이 있는데 동굴마다 이채로운 훌륭한 벽화가 많이 그려져 있었다.이것을 독일등 동서방 국가들이 앞다 퉈 훔쳐 자기나라의 박물관으로 빼돌린 것을 보고 그는 중국의 문화유물을 발굴,정리하지 않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고 느꼈다고 한다.
서양사람들의 대중국 역사관을 바꾸게 하기 위해 중국 문화유물의 발굴과 고증에 전력했던 그는 47년 신강에서 제20회 개인전을 끝낸 후 난주로 고찰을 떠나는 도중 그가 탄 군용비행기가악천후로 추락하면서 생을 마감했다.
키즐,돈황석굴등의 벽화,중앙아시아의 문화유물을 서양화 기법으로 세밀히 模寫한 그의 문화재 보호활동은 정부로부터 크게 인정받아 「光榮之家(영광스런 집안이란 뜻)」란 호칭을 부여받는 영예를 누렸다.
또 티베트.코사크.몽고.위구르등 중국내 소수민족의 생활풍속도를 살아 움직이는듯한 화법으로 묘사해 靜的 이미지를 추구하던 당시 중국 화단에 새바람을 불러일으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번 유작전은 20세기 초반 동양에 소개된 프랑스 인상주의 화풍의 실상을 확인하게 하는 절대적인 자료인데다 그가 한국인 출신 작가라는 점에서 한국미술사의 영역을 중국까지 새롭게 확대한다는 등의 큰 의의가 있는 것으로 미술관계자들은 보고 있다.
〈洪垠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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