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아웅산 경호·정보 책임자 유임|이례적인 면책인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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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83년 10월9일 북한의 아웅산 폭발테러는 5공 정권의 심장부에 큰 타격을 가했다. 우선 전두한 대통령의 외교·경제 지용이 무너졌다. 서석준 총리·서상철 동자장관·김재익 경제 수석·이기욱 재무차관·강인희 농수산부차관·김용한 과기처차관·하동선 해협위 기획단장 등 전 대통령이 의존해온 경제 테크너크랫들이 일거에 사라졌다.
이 때문에 참사의 와중에서도 전 대통령이 이들의 공백을 어떻게 메울 것인가와 참사에 대한 인책을 어떻게 할 것인가가 초미의 관심 사였다. 그 중에서도 노길영 안기부장과 장세동 경호실장의 거취가 가장 주목을 끌었다.
예상대로 전 대통령은 침울해진 나라의 전체분위기를 일신하기 위해 김상협 총리 경질을 포함한 전면 개각을 단행했다. 한때 숨진 장관의 자리만 충원하는 소폭개각 얘기가 있었으나 결국 총리를 포함시켰다. 그러나 상식적으로 인책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점쳐졌던 경호책임자 장 실장과 정보책임자 노 부장은 끄떡없었다. 무사한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위상이 강화됐다.
노 부장은 전 대통령의 신임이 두터웠던 이범석 외무장관·김재익 경제수석의 죽음으로 외교업무는 전담하다시피 됐고 경제정책에도 관심을 가졌다. 일찍이 허화평·허삼수씨의 퇴진으로 권부의 중심을 차지했던 장 실장은 여전히 측근중의 측근으로 전 대통령의 권력 관리와 인사운영을 보좌했다.

<두 허 교체와 대조적>
전 대통령이 내외의 인책요구에도 불구, 두 사람의 사표를 반려한 이유를 놓고 말들이 많았다. 이 같은 물음에 대해 청와대 주변에서는 『장 실장이 유임된 것은 국가원수가 무사해 직접 인책사유가 없기 때문』이라는 비공식 설명이 나돌았다. 국가자존심을 내세우는 버마의 배타적인 경호자세로 인해 우리 경호의 손길이 미치기 어려운 한계상황을 전 대통령이 인정했다는 것이다.
또 사건직후 북한의 테러범죄가 아니라 한국의 자작극이라는 악성 유언비어가 나돌아 장 실장을 서둘러 인책하는 것이 이를 뒷받침하고 우리의 잘못과 책임을 시인하는 꼴이 된다는 논리도 등장했다. 청와대출신 Q씨의 증언.
『사건직후 버마 영빈관으로 찾아온 네윈에게 전 대통령은 북한의 행위로 단정했지요. 그러나 그것은 전 대통령의 직감에 의한 것이지 증거는 없었어요. 오히려 네윈은 버마 내 반체제세력 또는 인종분규 당사자들이 저지른 사건이 아니가해서 좌불안석이었지요. 네윈은 북한 테러범이 잡힌 후에도 신중을 기했지요. 그런 판에 우리 내부에서 인책문제를 거론하는 것은 적전분열의 인상을 줄 우려가 있다고 생각한 것 같아요. 버마가 북한이 저지른 범죄라고 공식판정을 내린 것은 사건발생 26일만 이었지요. 내부적으로 노 부장·장 실장이 책임을 져야한다는 얘기가 있었지만 전 대통령의 상황판단이 그렇지 않음이 분명해 공론화 되지는 못했어요.』보안사령부 쪽에서도 인책건의는 없었고 경찰정보도 그런 내용을 올리진 못했다. 그때는 대북 경계와 적개심을 경쟁적으로 불태우고 있어 군부 일각에서는 더 이상 앉아서 당할 수 없다며 보복공격을 주장하는 분위기였다. Q씨의 증언.
『일부 전방지휘관들이 국가원수에 대한 테러는 선전포고와 같다며 김일성에게 보복하자고 흥분했지요. 군부의 이런 움직임에 세네 월드 한미연합사령관은 걱정스런 얼굴을 하고 전 대통령을 찾아왔었지요. 그러나 전 대통령은 랑군에서 돌아온 10일 새벽 이미 군사적 보복이 아닌 외교적 대응을 하겠다고 입장을 밝혔지요.』

<경호한계 상황 인정>
이 때문에 미국의 협조와 도움은 신속했다. 전 대통령이 랑군공항을 출발하는 시간부터 AWACS(조기경보기)들을 띄워 북한의 동향을 살피고 우리군의 동정도 추적했다. 전 대통령도 즉각 전방을 돌면서 『충성을 보여주어 고마우나 북한과 싸우느냐 마느냐의 판단은 나에게 맡겨야 한다. 내가 때리는 게 적기라고 할 때까지 가만있어라. 만약 독단적으로 부대를 움직이면 나에 대한 불충』이라고 진정시켰다 ,
그러나 이 같은 상황 말고도 전 대통령이 장 실장을 유임시킨 것을 「그럴 수밖에 없는」두 사람간의 인간관계를 들어 설명하는 사람이 더 많다. 하나회 출신 민자당 의원 Z씨의 회고.
『전 대통령은 장 실장에게 일종의 빚을 졌다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당연히 참모총장 감으로 키워주어야 했는데 사단장도 못시키고 경호실장으로 데려다 쓴데 대한 것이었지요. 아웅산 사건으로 불명예스럽게 그만두게 하는 것은 아예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지요. 당시 신 군부 출신들은 정계나 관계 등 군대바깥에서 출세하는 것을 대단하게 여기지 않았었지요. 가령 정치하기 싫다는 정순덕씨를 예편(1군단 참모장)시켜서 미안하니 정무1수석과 민정당 사무총장을 시켰다는 식이었지요. 철저한 군 우위로 관직은 그 하위수준의 전리품 나눠주기 정도로 생각했지요.』

<직언파 사라진 가운데 노·장씨 승승장구…후계자 반열까지>
물론 전 대통령이 두 사람을 버리지 않은 것을 놓고「측근 공백」을 걱정했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조금도 불편을 느끼지 않도록 완벽하게 일을 처리해주는 두 사람의 대안을 찾기 어려웠으리란 짐작도 있었다. 아울러 전 대통령의 12·12의 논공행상에 대한 본심이 나타났다는 분석이 있었다. Z씨의 증언.
『12·12의 논공에 있어 전 대통령은 두 허씨 보다 장 실장에게 더 높은 점수를 주었던 것이 확실해요. 전 대통령은 장세동이가 목숨 걸고 낱 지켜주었어. 1등 공신이야」라는 얘기를 직접 하기도 했습니다. l2·12에는 세 갈래의 결정적 기여자들이 있었지요. 국방부 와 특전사를 제압한 것은 박희도·최세창 등 공수여단장들이었지요. 또 정승화 총장을 연행한 것은 허삼수·우경윤 대령이었고 정도 영·허화평이 보안사에서 지휘총책을 맡았지요. 그러나 전 대통령은 장태완 수경사령관이 진압군을 모으고 하는 상황에서 경복궁 30 경비단장으로 자기를 지켜주고 지휘부를 구성해 온갖 연락을 취한 장세동 대령의 공이 가장 컸다고 봤던 거지요. 전 대통령의 그 같은 평가는 그후 집권에 성공하자 행동으로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Z씨의 이어지는 증언. 『처음부터 장 실장에 대한 대우는 파격적이었습니다. 두 허씨를 월권한다 해서 내쫓고 이·장 사건 때 관련회사(공영토건)사장과 친하다는 이유로 권정달 민정당 사무총장을 쉽게 경질한 것과는 본질적으로 달랐어요.
이런 예를 봐도 알 수 있어요. 권 총장을 경질한 후 한 측근이 심경을 물어보았더니 전 대통령은「잘됐다. 지금 아니면 자를 기회도 없지 않는가」라고 했대요.

<군서 대북 보복 거론>
전 대통령은 권 총장을 대수롭지 않게 봤어요. 하나회출신이 아니면서 전 대통령의 신임을 얻어 실세행세를 하는 권 총장에게 하나회 내부에서는 불만이 많았어요. 그런 얘기를 듣고 있던 차에 권 총장이 걸렸으니 별로 부담을 갖지 않고 자른 것이지요.』
전 대통령은 국가동량지재를 잃었어도 노 부장·장 실장의 보좌만 있으면 너끈히 국정을 운영할 수 있다고 마음먹고 있었음이 틀림없다. 장 실장의 유임으로 정보책임자 노부장의 인책문제도 자연히 사라졌다. 노부장의 면책에는 버마 방문에 소극적인 자세를 보인 점이 인정된 측면도 있다. 순방을 중단하고 귀국한 다음날 청와대에서 노 부장을 만난 이순자 여사는『(버마 방문을)막으려면 좀더 철저히 막아주실 일이지…』라고 아쉬움을 표시했다고 한다.
아웅산 참사로 외교·안보 쪽에서는 단연 노 부장 독주체제가 이뤄졌다. 이범석 외무장관의 죽음이 그에 대한 전 대통령의 의존도를 더욱 높인 것이다. <26면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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