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通南通美' 전략의 실험 무대...워싱턴 가는 징검다리로 삼을 듯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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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호 02면

지난해 7월 20일쯤. 정부는 남북 정상회담을 북측에 제의했다. 북한이 장·중·단거리 미사일 7발을 발사한 2주 후였다. 판문점 연락관 접촉을 통해 노무현 대통령의 정상회담 타진 메시지를 전했다. 남북 간 공식 채널이었다.

김정일의 남북 정상회담 셈법

북한의 미사일 발사는 미국의 전방위 압박에 대한 반발이었다. 당시 북측은 “상부에 정확히 전달하겠다. 기다려달라”고 말했다. 그러나 북측은 호응하지 않았다. 공식 회담 제의는 현 정부 들어 두 번째였다. 첫 번째는 2005년 6월 정동영 당시 통일부 장관이 평양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나 직접 메시지를 전했다. 정상회담 시기와 장소는 북한에 맡긴다는 것이었다. 김 위원장은 “(노 대통령을) 만날 용의가 있는데 좀 더 두고 보자”고 했다. 그 당시 정상회담은 무르익었지만 그해 9월 미국의 대북 금융제재가 시작되면서 무산됐다. 지난해 미사일 발사 직후의 정상회담 제의는 이 연장선이었다(당시 정부 고위 당국자 인터뷰 재구성).

김 위원장이 마침내 정상회담 카드를 빼들었다. 지난달 29일 김양건 노동당 통일전선부장 명의로 김만복 국정원장의 방북을 초청했고, 노 대통령의 평양 방문(28~30일)이 결정됐다. 장소와 시기는 북측에 맡긴다는 1차 정상회담 제안대로 된 듯하다.
김 위원장은 왜 이 시기를 택한 것일까. 첫째는 정세에 대한 자신감이 녹아있는 것 같다. 그는 지난달 3일 양제츠 중국 외교부장을 만나 “최근 한반도 정세가 완화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고 말했다. 안보 환경이 바뀌고 있다는 얘기다. 결정적 계기는 미국의 대북정책 전환이다. 지난해 11월 의회 중간선거에서 집권 공화당이 참패하면서 조지 W 부시 행정부는 “북한과 협상하지 않는다” “나쁜 행동에 대해 보상하지 않는다”는 대북 협상 원칙을 접었다. 직접 협상으로 돌아섰다. 올 1월엔 북한과의 베를린 협상을 통해 북한 비핵화의 초기조치를 담은 6자회담 2·13합의의 밑그림을 그렸다. 미국은 북한의 아킬레스건이던 금융제재를 풀었고, 크리스토퍼 힐 차관보가 두달전 방북했다. 6자회담은 북·미 양자회담을 추인하는 ‘고무도장’이 돼 가는 판이다.

김 위원장이 뒷전에 앉아 있을 이유가 없다. 그는 2003년 3월 미국의 대이라크전이 시작되기 한 달여 전부터 장장 50여 일간 잠행했다. 상당시간을 천혜의 요새인 삼지연 쪽에 머물렀다는 전언이다. 부시 행정부 출범 이후 지금과 같은 안보 환경은 없었다. 그런 만큼 이번 남북 정상회담은 김 위원장이 공세적 외교에 나서는 신호탄일 수 있다. 그는 2000년 6월 남북 정상회담 이후 주변국을 상대로 활발한 정상외교를 벌였다. 경제회생을 위한 개혁조치를 밟아나갈 가능성도 있다. 중국의 후진타오 국가주석은 북한이 취약한 안보 환경 때문에 중국식 개혁·개방에 나설 수 없다고 말했다. 지난해 부시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다.

올해 6자회담 결과를 빗댄 만평.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핵무기를 갖고 있으면서 6자회담 참가국의 경제지원을 끌어냈다.

두 번째는 남한과 미국 정부의 임기 말을 겨냥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레임덕 외교’다. 민주주의 국가와의 기다리기 게임(Waiting Game)에서 임기가 따로 없는 절대 권력자만이 구사할 수 있는 외교다. 통치유산(legacy)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국가 지도자의 약점을 파고들 수 있다.

먼저 남한. 노무현 정부는 북한의 비핵화와 한반도 평화체제의 초석을 놓기를 바란다. 노 대통령에겐 위업을 달성할 수 있는 사실상 마지막 기회다. 김 위원장은 여기에 일정 부분 호응하면서 반대급부를 챙길 수 있다. 남측은 이미 대규모 경제지원 의사를 간접적으로 밝혔다. 내년 12월에 대선을 치르는 미국의 정치일정을 감안하면 어차피 일정 부분 비핵화의 길을 가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이라크에 발목이 잡힌 미국이라도 가만히 앉아 있을 리가 없다. 사회간접자본(SOC) 투자는 남한의 현 정부에서 끝날 일이 아니다. 차기 정부와의 연결고리가 될 가능성이 크다. 스즈키 노리유키 일본 라디오프레스 이사는 “남북 정상회담은 남한이 계속 타진해왔기 때문에 북한이 언제 수락할지가 초점이었다”며 “북한은 남한과 경제지원에 합의하면 다음 남한 정권도 여기에 구속될 것으로 판단한 것 같다”고 말했다(니혼게이자이). 북한이 올해 신년 3개지 공동사설에서 ‘경제 강국’을 기치로 내건 것은 그런 점에서 곱씹어볼 대목이다.

이 시기 남북 정상회담은 남한의 대선 정국을 내다본 것일 수도 있다. 북한은 신년 공동사설에서 남한에서의 보수정권 탄생을 막겠다는 입장을 보였다. ‘남조선의 각계각층 인민들은 반보수 대연합을 실현하여 올해의 대통령선거를 계기로 매국적인 친미 반동 보수세력을 결정적으로 매장해버리기 위한 투쟁을 더욱 힘있게 벌려 나가야 한다’고 했다. 현실은 어떤가. 10년 동안의 진보 여권은 지리멸렬하고, 보수 야권은 대선후보 경선을 코앞에 두고 있다. 북한의 대남 라인은 남북 정상회담이 정세 반전에 한몫할 것으로 판단했는지 모른다.

김 위원장은 남북 정상회담을 북·미 관계정상화의 디딤돌로 삼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을 수도 있다. 서울을 통해 워싱턴으로 가는 전략이다. 통남통미(通南通美)다. 남북 정상회담을 9월 초에 열릴 것으로 보이는 6자회담 본회담과 6자 외무장관 회담 직전으로 잡은 데는 대화 분위기를 극대화하려는 계산이 깔려 있는 것 같다. 이런 흐름에서 북한이 비핵화의 바퀴만 굴리면 부시 행정부는 대북 협상 수준을 높일 수 있다.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장관의 방북은 놀랄 일이 아니다.

부시 대통령도 임기 중 한반도 평화체제를 탐낼 가능성이 크다. 이라크 전후 처리가 수렁에 빠지면서 사면초가에 몰린 그다. 한반도 정전체제 종식 작업은 그에게 남은 몇 안 되는 탈출구다. 뒤늦게 팔레스타인 국가 수립을 축으로 한 중동 평화협상의 시동을 걸었지만 대북 협상보다는 실적을 올리기 어렵다. 부시 대통령이 지난해 11월 하노이 한·미 정상회담에서 남북, 미 정상 간 종전선언을 언급한 것은 통치 유산을 염두에 뒀을 수 있다. 미 행정부 인사들이 남북 정상회담을 통한 남한의 대북 경제지원이 6자회담의 접착력을 떨어뜨릴 것으로 우려하면서도 기대를 나타내는 것은 이와 무관치 않은 것 같다. 예전의 부시 행정부가 아니다. 김 위원장은 그런 부시 대통령의 임기 중에 되돌이킬 수 없는 북·미 관계 개선의 틀을 만들려 할 수 있다.

남북 정상회담은 동북아에서 김 위원장의 외교적 입지를 넓혀준다. 대북 강경 일변도인 일본의 아베 신조 정권을 궁지로 몰 수 있다. 일본은 남북·미 3자가 6자회담을 주도하면서 외교적 고립을 느끼는 분위기다. 김 위원장의 서울-워싱턴 연계 전략은 중국에 대한 정치·경제적 의존도를 줄여준다. 미국을 향한 중국의 북한카드는 소멸되고 있는 셈이다.

이번 남북 정상회담은 김 위원장이 핵 포기의 결단을 내렸는지를 판단하는 시금석이 되기에는 아직 이르다. 김 위원장이 갖고 있는 외교적 카드가 많아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레임덕 외교’는 양날의 칼이다. 남한과 미국에 새 정권이 들어서면 김 위원장은 다시 외줄타기 게임을 해야 할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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