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잣거리 풍경] '이헌재 펀드'의 갈 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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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4면

'이헌재 펀드'가 화제다.

'거대 펀드'로 발전할 것이라고 보는 긍정론이 있는가 하면, 그저 그런 '휘발성(揮發性) 펀드'로 끝날 것이라는 부정적 시각도 있다. 저잣거리의 전망을 갈라놓는 주 요인은 그의 이름이 지닌 공공성 때문이다. 공공의 갑옷을 걸쳐 입었던 전 재경부 장관 이헌재라는 자연인이 이익추구 전선(戰線)에 걸맞은 '철저한 시장인'으로 변신할 것이라는 기대를 가진 쪽이 있는 반면 '공공성의 함정'에서 쉽게 빠져나오지 못할 것이라는 전망이 팽팽히 맞서 있는 것이다.

특히 "우리은행을 인수하겠다"는 그의 공언은 시장의 이 같은 상반된 견해를 더욱 갈라서게 만든 계기가 됐다. "돈은 '가장 단꿀'이 있는 쪽부터 찾는다"는 속성을 고려해 볼 때 과연 우리은행이 현존하는 '가장 단꿀'에 해당하는가 하는 의문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가 다르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은행이 '최고의 돈벌이감'이 아니라면 펀드 매니저로서의 이헌재 펀드는 '투자 우선순위 설정'을 잘못한 것이고, 그 결과 돈을 댄 주주들의 기대를 외면하는 결과가 된다는 지적이다.

그렇다. 우리은행이 현존하는 '최고의 돈벌이감'이 아닐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그러나 이헌재 펀드는 이제 막 출범하려는 순간에 서 있다. 주주들도 처음 몇건은 쉽게 고개를 끄덕일 수 있다. 하지만 이헌재 펀드가 공공성을 의식, 지속적으로 '최선(optimal)'이 아닌 '차선(次善) 투자감'에만 관심이 있고 그 결과 '빈 배당 바구니'만 돌려댄다면 투자자들은 떠날 것이고, 따라서 '휘발성 펀드'를 면키 어려울 수 있다.

적지 않은 저잣거리 사람들은 이헌재 펀드가 "외국자본들이 국내 금융기관들을 마구잡이로 잡아먹는 '황소개구리' 역할을 계속하도록 방치할 수 없다"는 관가(官街)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는 타이밍을 비집고 출현했다는 점에 주목한다. 이헌재 전 장관은 백기사를 자임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황소개구리가 우리은행을 습격하기 전에 사전적이고 예방적으로 자국 은행을 방어하겠다고 나선 것이라는 추측이다. 주주를 위한 수익률 극대화보다는 공공성 확보에 편승하고 있다는 비판과 맥을 같이하고 있는 그것이다.

과연 그런가. 이에 대해 이헌재 장관을 잘 아는 사람들은 그가 냉철한 사람이며 따라서 '막연한' 국수주의(國粹主義)에 함몰돼 투자자 기대를 외면할 사람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특히 이헌재 펀드는 일반인이 돈을 대는 '일반펀드'라는 게 이들의 지적이다. 만약 정부 돈으로 만들어질 '이헌재 펀드'라면 굳이 우리은행에 손댈 이유가 없다. 현재 우리은행에 대한 정부 지분 형태를 그대로 유지하는 것이 더 낫기 때문이라는 게 이들의 지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헌재 전 장관이 던진 '우리은행 인수'라는 화두(話頭)의 뿌리는 그의 오랜 구조조정 경험에서 찾아야 한다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그가 외환위기와 구조조정의 한복판에 서 있던 남다른 경험을 바탕으로 조금만 바꾸면 공기업이나 은행의 가치를 두배.세배 올려놓을 수 있다고 자신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게 이들의 분석이다.

어찌됐건 이헌재 펀드는 이제 우리 시장의 엄연한 현실이다. 이헌재 펀드는 기관이 아닌 한 개인도 투자자의 기대에 부응할 수만 있으면 조(兆)단위가 넘는 시장 자금과 신뢰를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웅변적으로 보여준 사건(?)임에 틀림없다.

양봉진 세종대 경영대학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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