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리『토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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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1987년의 한가위. 까치들이 울타리 안 감나무에 와서 아침 인사도 하기 전에…」로 시작는 박경리씨의『토지』는 구한말에서 해방에 이르기까지 우리 근대사의 운명과 근대인의 영혼에 도전하고 있는 역사소설이다.
『현대문학』69년 9월호에 첫 선을 보인『토지』는88년 4부까지 출간되었고 5년여의 공백기를 거쳐 최근 5부 1권이 나왔다.
1, 2, 3부까지는 주로「최참판댁」의 4대에 걸친 가족사의 운명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1대는 윤씨 부인을 비롯한 구한말 세대이며, 2대는 최치수와 김환·용이·월선과 같은 식민지 초기 세대로서 봉건적 인습의 굴레와 새로운 현실 사이에서 첨예한 갈등을 겪는다.
3대는 이 소설의 주축이 되는 최서희와 길상의 세대이다. 이 세대에는 식민지시대 지식인과 민중적 삶의 방향에 대한 다양한 모색을 보여주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이들의 자식 세대인 4대는 빈부의 갈등, 역사적 사건과 개인적 운명의 충돌이 더욱 심화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4부에서부터는 작가의 시선이 더욱 넓어지고 깊어진다. 작가는 어느덧 민족의 대지 곳곳에 두루 자신의 눈빛을 투사하여 정한과 생명사상, 휴머니즘과 민족주의 등의 문제를 깊이 있게 형상화하는데 성공한다. 그리고 5부에서 그것은 더욱 심화된다. 1940년부터 1945년까지를 시간 배경으로 하여 작가는 암흑기 민족의 운명과 인간의 개성적 국면들을 묘사하고 있다. 일제가 곧 패망하리라는 희망과 일제의 최후발악을 견뎌야하는 절망이 교차하는 가운데 독립자금 강탈사건은 실패로 돌아가고 송관수는 갑작스레 죽게된다. 이에 길상은 자신의 회한 어린 과거를 정리하면서 마지막 원력을 모아 도솔암에 관음탱화를 그리고 그 동안 몸담아 오던 동학당 모임을 해체한다. 이런 5부 1권에는 일본에 대한 면밀한 탐색과 민족주의, 가족주의와 개인주의, 허무주의와 예술론 등이 집적되어 복잡한 실타래를 형성하고 있다. 특히 작가의 뛰어난 묘사와 서사력에 힘입어 각각의 개인들은 저 마다 고유한 영혼을 지닌 존재로 살아있으며 자신만의 말과 표현을 얻고 있다. 이 같은 말과 표현들이 서로 어울리고 대화하며 다성적인 민족의 교향악적 대서사시를 이루어가고 있는 것이다.
박씨의『토지』는 민족의 땅이요, 역사의 땅이다. 소유의 땅이며 또한 존재의 땅이다. 한의 땅이면서 동시에 그것을 넘어서는 생명의 모태공간 같은 상징성을 지니는 땅이기도 하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것은 가장 기름진 인문적 지혜와 역사적 상상력의 땅이며 가장 찬연한 민족문학의 땅이라 할 수 있다. 요컨대『토지』는 우리 민족사와 역사적 상상력이 총체적으로 어우러진 현대의 살아있는 대서사시다.【우찬제<문학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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