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권력남용 첫 불법인정/국제그룹 해체 위헌판결 배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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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합법절차 무시한 자의조치 판단/기업자유주의 원칙확인 큰 의미
헌법재판소가 29일 「5공당시 전두환 대통령이 사기업인 국제그룹을 해체토록 지시한 것은 위헌」이라는 결정을 내린 것은 대통령의 공권력 행사도 법테두리 안에서 이뤄져야 한다는 원칙을 처음으로 확인한 것으로 경제질서에 큰 획을 긋는 결정이다.
우선 이번 결정은 헌법재판소가 우리나라 헌정사상 전례없이 대통령의 직무상 권한을 정식으로 헌법재판의 대상으로 삼아 「대통령에 의한 공권력 행사도 헌법 내에서 시행돼야 하며 이를 어기는 것은 명백한 위헌」이라는 이른바 법치주의의 대원칙을 새로 확인했다.
이번 결정은 무엇보다도 「민주주의의는 인치가 아닌 법치여야 하며 공권력 행사의 목적보다는 합법적인 절차의 준수가 존중돼야 한다」는 법치주의의 기본 원칙을 확인한 것이다.
○경제질서에 큰 획
재판부는 결정문에서 『▲대통령의 국제그룹 해체지시는 법치국가적 절차를 어긴 것인데다 ▲법에 근거하지 않은 대통령의 자의적 조치는 금지돼야 하며 ▲법적근거없이 공권력이라는 힘으로 사기업을 해체한 것은 개인 기업의 자율과 경영권 불간섭 원칙을 위배한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민주주의의 경제적 토대를 제공하는 자본주의의 기본 요소인 사기업을 국가 공권력이 멋대로 칼질하고 끝내 기업을 해체시킨 것은 자의적인 공권력 행사로 자칫 자본주의의 질서를 해치고 더 나아가 민주주의의 근간마저 해칠수도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재판관들은 지난 85년 당시 국제그룹의 주거래 은행이었던 제일은행측이 국제그룹을 회생시키는 방향으로 금융정책을 건의했고 이같은 건의를 당시 김만제 재무부 장관이 받아 들였음에도 전두환 대통령이 자의적으로 국제그룹의 해체를 지시한 것은 명백한 위헌이라는 판단에 견해가 일치했다고 말한다.
이같은 결정은 과거 30년간에 걸친 군사정권이 물러가고 문민정부가 들어섬으로써 가능한 것이다.
이날의 헌법재판소 결정으로 양정모씨가 해체된 기업들을 되살릴 수 있는 길이 열려 재계에도 엄청난 파문을 불러 일으킬 전망이다. 우선 양씨는 일단 명예회복과 함께 자신이 빼앗긴 국제그룹 산하기업들의 주식,곧 경영권을 되찾는 발판을 마련했다고 볼수 있다.
그는 현재 국제그룹 해체당시 국제상사 등을 넘겨받았던 (주)한일합섬을 상대로 주식인도 청구소송을 진행중이어서 이 소송의 결과에 벌써부터 관심이 쏠리고 있다.
○엄청난파문 불러
양씨는 지난 88년 4월 한일합섬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해 1심에서 패소한 뒤 현재 서울고법에 항소심이 계류중인 상태이나 앞으로 법원은 헌재의 이같은 결정을 존중해야 되는 입장이어서 양씨로서는 소송에서도 유리한 입장에 서게된 셈이다.
이번 결정은 그동안 무소불위로 치부돼 왔던 대통령의 권한도 「헌법을 수호하는 범위내에서 이뤄져야 한다」는 지극히 당연하기도 한 헌정질서의 대원칙을 재확립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며 또한 사기업을 공권력이 함부로 훼손할 수 없다는 자본주의의 기본 원칙 또한 보호받았다는 데서 경제질서에 큰 획을 긋는 것이다.
지금까지 대통령의 행위는 「통치권」이라는 이름으로 법적 판단의 대상이 되지 않았던 게 사실이다. 그러나 헌재가 『법은 만민앞에 평등하다. 대통령·재무장관 기타 어떠한 공권력도 법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고 명시함에 따라 앞으로는 대통령이라 할지라도 자의적인 공권력 행사를 할수 없음이 명백해 졌다는 점에서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또 전두환 전 대통령이 국제그룹의 해체과정에서 부당한 공권력을 행사한 것이 분명해진 이상 이 부분에 대한 형사책임을 어떻게 다룰 것인지를 놓고도 앞으로 논란이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김종혁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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