접대비 50만원 넘으면 증빙서류 내라는데 편법 속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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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에 쥐납니다."12일 그룹 본부에서 내려온 공문을 읽은 삼성 직원의 푸념이다. 공문 요지는 '50만원 이상 접대비를 쓸 때 접대 목적과 접대받은 사람의 인적사항을 적어 내라'는 것이다.

그러나 구체적인 '행동지침'이 없어 이 직원은 고민에 빠졌다. 명함만 받아두면 되는지, 주민등록번호도 받아둬야 하는지, 혹시 그러다가 고객만 불쾌하게 만들어 접대하려다 욕만 먹는 것은 아닌지…. "어찌하면 되느냐"며 본부에 되물었다. 그가 들은 답변은 "우리도 잘 모르겠다. 곧 2차 공문을 내려보내겠다"였다.

◇혼란 겪는 업계=50만원 이상 접대비의 경우엔 증빙서류를 갖추도록 한 국세청 지침 때문에 기업들이 혼란에 빠졌다. 몇 사람이 호텔 식당 같은 곳에서 저녁 한끼 먹으면 50만원은 훌쩍 넘어버리는 현실에서 이를 지키기 쉽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기업들은 국세청 지침을 지키면서 접대 대상자가 기분 나쁘지 않도록 하는 '묘안 찾기'에 골몰하고 있다.

이에 따라 기업들의 활동이 위축되는 경우도 있다. 두산 관계자는 "필요한 경우지만 접대비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몰라 업무에 혼선이 오고 있다"고 말했다. 포스코는 아예 50만원 이상 접대비를 쓸 땐 사전에 부서장의 허락을 받도록 했다.

유흥업소와 골프장 업계는 비상이 걸린 상태다. 한 룸살롱 업주는 "국세청 방침은 불황에 시달리는 업소에 직격탄을 날린 것"이라며 "업소들이 살아남기 위해 할인 경쟁을 하고 있다"고 전했다. 골프장도 수입 감소와 회원권 가격 하락을 걱정하고 있다.

◇취지는 '타당', 실효성은 '의문'=기업들은 '건전한 접대문화의 정착'이라는 취지엔 동의하지만 현실적으로 이를 지키기가 어렵다는 반응이다. 이를 피하기 위한 편법이 양산되고, 또 접대 대상자의 정보 누출이 우려되는 등 부작용도 작지 않다는 것.

예컨대 고액 카드결제가 어려워지자 한 유흥업소에서는 여러개의 사업자등록을 해놓고 다른 상호로 결제해 주는 등 편법이 동원되고 있다고 한다. 비자금이 만들어질 우려도 있으며 상품권이 룸살롱 결제 수단으로 활용될 가능성이 크다는 게 업계의 얘기다. 이에 따라 국세청은 기업이 50만원 이상의 상품권을 한꺼번에 사들인 뒤 50만원 미만으로 쪼개 여러 거래처에 나눠줬을 경우 증빙서류를 갖춰야 비용으로 인정받도록 했다.

김일섭 이화여대 부총장은 "국세청 방침은 타당하지만 우리 기업의 오랜 관행으로 편법이 생길 우려가 커 실효성에 의문이 간다"고 말했다. 그는 또 "국세청은 세금 징수 목적으로만 접대비 명세를 봐야지 그 정보를 보유하지 말아야 하며, 정보 유지 책임은 기업이 갖도록 법적으로 보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선구.정재홍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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