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J이후 민주당/새 풍속도/「최고회의」로 날지샌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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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9인9색에 했다하면 10시간 일쑤/결론 빨리 도출안돼 김 총무만 골탕
「아침 9시부터 저녁 6시반까지」 「저녁 7시부터 새벽 2시까지」.
어느 회사의 주·야간 근무시간이 아니다. 민주당 최고위원들의 요즘 회의시간이다.
회의가 열렸다하면 4∼5시간 정도는 약과. 9∼10시간 이상이 허다해 민주당은 회의로 날이 지샌다는 말이 나돌 정도다.
14일 국회 이기택대표 방에서 문을 걸어잠근채 열린 최고위원 회의는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9시간 계속됐다. 그러나 4가지 안건이 상정된 이날 회의가 끝난뒤 박지원대변인의 발표는 하루종일 논의할 내용치고는 너무나 빈약했다. 결론이 난 건은 「김대중 납치사건 진상조사위」를 구성한다는 한가지뿐.
광명 보궐선서 공천과 당직인선때는 아예 남산중턱의 모호텔로 자리를 옮겨 9명의 지도부가 철야로 체력싸움을 벌인 예도 있다.
장시간 회의는 집단지도체제후 나타나고 있는 제1야당의 대표적인 새 풍속도다. 김대중 전 대표 시절에는 회의시간이 짧았다. 길어도 한시간을 넘는 예가 극히 드물었다.
김 전 대표는 반대의견이 예상될 경우 미리 「정지」작업을 벌인뒤 회의에 참여한다. 이른 아침 동교동 자택정원에서 화초를 돌보는 시간이 주로 대책회의 시간이었다. 그는 권노갑·남궁진·김옥두의원 등 당시 비서진들에게 『○○의원이 이런 발언을 할테니 이렇게 미리 설득하라』는 식으로 지침을 줬다고 한다.
회의에서 관철해야 할 「요체」를 미리 동교동에서 보도진에게 공개해 기정사실화하는 방법도 사용했다.
「외곽을 때리는」 노련한 전술을 구사했던 셈이다.
이에반해 이기택대표와 8인의 최고위원이 등장한 집단지도체제는 매일 9인9색의 백화제방 시대를 맞고 있다. 최고위원 회의 한 멤버는 『이 대표의 물에 말탄듯 술에 술탄듯한 탈카리스마 스타일도 장시간 회의에 큰 몫을 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이 대표는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 얘기나 한번 들어봅시다』며 운을 뗀다.
8명의 최고위원들이 각자의 「이익」을 대변하며 한마디씩 해도 거의 한시간이 소요된다. 언론인출신의 김원기·조세형·이부영최고가 특히 얘기를 많이 하는 편이고 유준상 최고도 그간 교통사고 치료로 병원에서 소모한 시간을 보충(?)하기라도 하듯 다변대열에 낀다.
이 대표는 회의중 좀체로 말이 없는 편이다. 다른 최고위원들이 발언에 지칠때쯤 「대충 의견이 모아진 것 같습니다』라며 자신의 의견을 얘기한뒤 회의를 정리한다. 오전에 이 대표와 뜻을 같이 했던 최고위원이 오후의 다른 사안에는 이 대표에게 「결사반대」하는 예도 다반사다. 회의결론이 확실히 「정리」되지않아 뒤에 혼선이 일어나기도 한다.
이 대표는 이런 회의 운영스타일을 『시대변화에 맞는 탈카리스카적 민주주의체제』라고 주장한다. 일부에서 『노태우스타일』이라고 꼬집자 『노태우씨는 잘 몰라서 듣고만 있었고 나는 다 알면서 듣는 차이가 있다』고 반박한다.
민주당 최고위원 회의가 시간을 끌면서 생긴 최대의 피해자(?)는 김윤식총무와 김영구 민자당 총무. 박준규 의장사퇴안 처리·국조권발동 등 국회의 시급한 대책결정때마다 김윤식총무는 발을 구른다. 「지침」이 늦어지기 때문이다.
김영구 민자총무는 매번 총무 접촉장소에서 김윤식총무를 애타게 기다려야만 한다.
말많은 제1야당의 이같은 새 풍속에 대해 평가는 엇갈린다.
조세형 최고위원은 『과거보다 회의에 임하는 마음이 홀가분하고 편하다』고 한다. 조 최고는 『5월달에 해야할 결정을 6월달에 하는 것이 아닌 이상 충분한 토의가 민주적』이라는 입장이다.
문희상 대표비서실장은 『민주주의와 효율성은 비례하지 않는다. 과거 군사독재시절이 효율성이 가장 뛰어나지 않았느냐』고 반문한다.
반면 당내 일부에서는 『이 대표의 지도부 장악력에 문제가 있는 것아니냐』 『1인대표가 아닌 9인대표체제의 취약점』 『계파이익의 첨예한 대결장』 『회의로 지새우는 지도부』 등의 곱지않은 시각도 있다. 어쨌든 민주당의 최고위원 회의는 DJ이후 「탈권위」의 새로운 모형실험을 하고 있다.<최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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