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우유전쟁] 33. 민족사관고 개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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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1995년 11월 5일 민족사관고 첫 신입생을 뽑는 시험이 치러졌다. 응시 대상자는 중학교 2, 3학년생 가운데 학년 성적 상위 1% 내로 제한했다. 경쟁률은 5대 1이었다. 선발된 학생들은 96년 1월 11일부터 사실상 학교 생활을 시작했다. 37일간 입학 전 예비교육을 받은 것이다.

그 해 봄이 오기 전 일반교육관.민족교육관.생활교육관.가정교육관, 그리고 운동장 등 주요 시설이 완공됐다. 이후 몇년 동안 새 건물이 속속 들어섰다. 이 때까지 들어간 교사 신축 비용은 모두 5백억원 정도다. 여기에 38만5천평의 학교 부지 매입 대금을 합치면 약 1천억원이 투입됐다.

마침내 '세상에 없는 학교'가 세워졌다. 96년 3월 1일. 해발 6백m의 덕고산 중턱에는 때이른 봄바람에 잔설이 하얀 꽃잎처럼 날리고 있었다. 아직 완공되지 않아 일부 건축자재가 드문드문 남아 있는 99칸짜리 한옥인 민족교육관의 앞마당에 있는 야외무대가 행사장으로 꾸며졌다. 민족사관고 개교를 알리는 제1기생 입학식장이었다. 전국에서 온 학부모와 교육계 인사.기자들이 연단 맞은편에 마련된 좌석의 앞자리에 앉았다.

연단 앞에는 한복 차림의 신입생 30명이 나란히 서 있었다. 눈 덮인 산자락을 휩쓸고 내려온 찬 바람이 옷깃을 파고들었으나 가슴 속 뜨거운 열정이 추위를 물리쳤다.

내가 개교 날짜를 굳이 3.1절로 잡은 이유는 3.1 독립만세 운동이야말로 우리 민족의 자긍심과 자주성을 국내외에 널리 알린 역사적인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이 때부터 민족사관고 입학식은 3월 1일이 됐다. 30명의 학생은 국민 가운데 극히 적은 수다. 그러나 나는 이들이 민족의 앞날을 밝혀줄 것이라는 꿈을 가졌다. 나는 축사에서 내 꿈을 얘기했다.

그러면서 신입생들이 내 꿈의 실현을 위해 동참해 주리라고 믿었다. 이어 환영사를 한 이규철 교장도 '꿈'을 얘기했다. "제군은 우리 조국을 부강하게 만들고 우리 민족을 다 같이 잘 살게하기 위한 민족사관교육과 영재교육을 통해 참다운 인간, 유능한 인재로 성장함으로써 앞으로 조국에 공헌하는 위대한 지도자가 될 것입니다. 이런 창학(創學)이념을 구현하기 위해 제군은 그 누구보다 웅대한 포부와 고결한 꿈을 가슴에 품고 용기와 기백, 끈기와 도량을 반드시 겸비해야 합니다."

입학식이 끝난 뒤 축하 공연이 펼쳐졌다. 우리음악연구회 회원들과 학생들이 공연에 참여했다. 예비교육 기간에 학생들은 틈틈이 사물놀이.판소리 등 국악을 배웠다. 그들의 어설프고 덜 익은 판소리와 사물놀이를 듣고 보면서 "이것이다. 우리 혼을 불어넣어야 한다"는 생각을 굳혔다. 우리음악연구회 회원들이 살풀이와 판굿.진도북춤을 공연하자 행사장 분위기는 절정에 달했다. 소떼가 풀을 뜯던 강원도 산자락에 민족혼을 드높이기 위한 출사표가 던져지고 있었던 것이다. 색다른 입학식 모습은 언론으로부터 주목받았다. 축하객들도 학교 발전을 빌어줬다.

그러나 정작 이날 행사의 의미를 정확하게 알고 있는 사람은 과연 얼마나 됐을까. 민족사관고의 출생이 갖는 의미를 제대로 알고 자녀들을 보낸 학부모는 거의 없어 보였다. 교사들 중에도 자신이 어디에 서 있는지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는 사람이 많지 않은 듯했다. 하물며 당사자가 아닌 구경꾼(?)에 불과한 상당수 축하객들은 더 말할 필요가 없었다. 세상에 이상한 학교가 하나 세워졌으니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고 얼마나 버틸지 한 번 두고보자는 정도의 가벼운 호기심을 가진 것 같았다.

학교가 들어선 언덕에서 내려다보면 파스퇴르유업이 한눈에 들어온다. 저 공장을 세워 저온살균우유를 정착시키기까지 얼마나 많은 적과 싸워야 했던가. 민족사관고가 제자리를 잡을 때까지는 그보다 더한 시련이 있을 것임을 나는 예감하고 있었다. 다만 이번에는 그 투쟁의 대상이 외부가 아닌 내부에 있을 것이라고 짐작했다.

최명재 파스퇴르유업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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