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 환수 고미술품 감정가들 증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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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JP 난병풍 2차 출장 감정땐 없어”/1차땐 소장여부 기억안나… 수작은 별로 없어/이후락씨 의외로 적어… 군인들 “싸게 평가” 항의
80년 5월 신군부에 의해 행해진 부정축재자 재산환수에서 미술품에 대한 감정은 모두 세차례에 걸쳐 이뤄졌으며 그 첫 감정은 80년 5월25∼30일 사이에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한국고미술협회 한기상회장과 공창호 상임고문은 『정확한 날짜는 기억할 수 없지만 신군부가 한국고미술협회에 환수 미술품에 대한 감정을 의뢰한 것이 바로 이 즈음』이라고 말했다.
당시 국내의 미술품 감정기구로는 한국고미술협회가 72년부터 운영해온 감정위원회가 유일한 것이었다.
신군부는 협회측 감정위원들에게 감정을 의뢰하며 「감정에 관련된 어떠한 사실도 발설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쓸 것을 요구했다.
당시 고미술협회 감정위원으로는 서화부문에 이용수·박주환·진동만·김두환·공창호씨,도자기부문에는 고장환·이상출·김창덕·오사섭·한기상씨가 활동하고 있었다.
소장자의 집에 직접 「출장」하는 형식으로 이뤄진 첫 감정은 서화를 감정하는 1인과 도자기를 감정하는 1인이 한조를 이뤄 진행됐다. 각서요구에 대한 감정위원들의 거부감으로 정작 감정작업에 참여한 사람은 김창덕씨와 오사섭씨 등 두명뿐이었다.
신군부는 서울 인사동에 있는 고미술협회에서 이들을 차에 태워 청구동 JP의 자택으로 향했다. 이 차에는 계엄사에서 파견된 3∼4명의 군인이 동행했다.
오전에 시작된 감정은 3시간 정도 소요됐다. 감정위원들이 거실에 걸린 작품이나 창고에 쌓여있던 작품을 보고 진위와 가격을 부르면 군인들이 이를 받아 적었다.
JP의 집에서부터 시작된 환수미술품 감정의 거의 하루정도 간격을 두고 이후락·박종규·박진만·이세호·김현옥씨 등의 가택을 돌며 잇따라 이뤄졌다. 김창덕씨는 『출장감정을 하러간 집이 대략 10곳 정도 되는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고 말했다.
당시 JP집에 동행한 군인들은 가격을 매길 때 『너무 싸게 매긴다』는 항의를 하기도 했다. 청구동 창고에는 한번도 개봉되지 않은채 표구사에서 포장 전달된 상태 그대로 쌓여있는 작품도 매우 많았다.
그러나 JP의 소장미술품들은 공작새에 모란을 그린 이당의 『화조도』 정도가 수작이었을뿐 「옳은 작품」(가치있는 진품이라는 뜻)은 별로 없었다고 김씨는 말했다.
또 골동가에서 제대로 안목을 갖춘 수집가로 평을 얻고 있는 이후락씨의 경우 『1천억원 정도 규모가 될 것』이라고 골동가 세평에도 불구하고 정작 집안에 있던 미술품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는 것이 김씨의 증언이다.
이번에 문제가 된 대원군 난병풍은 8폭 정도의 크기로 평소 거실에 넓게 편 상태로 걸려있는데도 JP집에 자주 드나들었던 한 문화계 인사는 『선물받은 작품이라는 얘기를 JP로부터 직접 들었으며 신통한 작품은 아니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출장감정을 나갔던 김씨는 『당시 그 집에 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며 『아마 있었다해도 기억이 잘 안나는건 작품이 좋지 않았었기 때문일 것』이라고 말했다.
이들은 1차 감정이 끝난뒤 한달쯤 지나 영등포구 문래동 대한통운 창고에서 2차 감정이 이뤄졌다. 이 때는 고미술협회에서 공창호씨 등 6명이 참여했다. 공씨는 『그때 그 자리엔 대원군의 난병풍이 확실히 없었다』고 말했다.
그후 3차 감정은 81년 4월30일 문래동 대한통운 창고에서 경매에 들어가기 직전 내정가를 결정하기 위해 이뤄졌는데 이때는 협회 소속 10명이 참가했다. 경매에는 골동장·고물상·보석상 등 50명 내외가 참가해 낙찰가의 10%를 써내는 형식으로 이뤄졌으며 유찰된 물품도 상당수였던 것으로 참여자들은 밝히고 있다.<홍근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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