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러운 과거」딛고 거듭나기/소장판사 사법부 개혁요구 안팎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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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사법부 불신 여론에 위기감 확산/재야법조계까지 자극… 파장클듯
서울민사지법 소장판사들의 성명서는 여러차례 논의를 거쳐 강도를 많이 완화했다는 이들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글 전체의 논조가 전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강경하다는 평을 받고 있다.
법조계에서는 이번 성명발표를 두고 71년 당시 서울형사지법 이범열 부장판사의 구속으로 법관 1백50명이 사표를 던진 1차 사법파동과 88년 김용철 대법원장의 사임을 몰고온 2차 사법파동에 이어 법조계에 「제3의 파문」이 밀어닥칠지 모른다고까지 전망할 정도다.
○정치판사 인책론
◇의미=이번 성명서에서 가장 주목할 점은 사법부 개혁이 철저한 자기반성과 과거청산 노력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고 강도높게 지적한 것이다.
판사들은 성명서에서 『권위주의 통치시절 판사들은 판결로 말해야 했을때 침묵하기도 했고 판결로 말해서는 안되는 것을 말하기도 했으며 판결이라는 방패 뒤에 숨어 진실에 등돌리기도 했다』며 권력에 야합해온 과거 사법부의 행태를 꼬집고 있다.
이같은 표현은 사법부가 진정으로 다시 태어나기 위해서는 유신·5공화국 정권 당시 권력의 압력에 의해 납득할 수 없는 판결을 하고도 아직 현직에 남아있는 법원내 인사들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이 완곡하게 반영된 것으로 볼수 있다.
일부 판사들은 특히 5공 후반기에 시국사건과 관련,많은 사람들이 사법부에 의해 단죄됐으나 무죄로 판결한 것은 단 한건도 없었다며 외부의 압력을 핑계로 단순 시위자에게 징역 5년이상의 중형을 내린 무소신 법관들에 대해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강경론」을 펼친 일부 법관들은 문건을 만들기 위해 토론하면서 법원내 「정치판사」들에 대한 책임추궁 요구를 문건에 포함시키자고 주장했으나 『책임추궁은 우리가 직접 해야할 몫이 아니다』는 「온건론」이 우세,문건에 우회적으로 언급하는 선에서 합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따라 이들이 주장하는 법관 인사제도 개혁과 법관회의 활성화 방안 등은 법관의 안정적인 지위확보를 통해 법관의 판결이 법원내외의 압력에 의해 침해당하는 것을 막아보자는 의도로 풀이된다. 소장판사들은 『정년까지 안심하고 판결문을 쓸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돼야 어떠한 외부압력에도 굴하지 않고 공정한 재판을 할 수 있다』며 이를 위해 대법원장의 인사권행사에 대한 견제장치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인사권견제 필요
이들은 『대법원장의 법관인사에 따라 사법부 전체의 분위기가 좌우되는 현 상황에서 법관들 스스로 심리적으로 위축돼 소신에 의한 판결을 하는데 장애가 되거나 재판과 판결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지적한다.
◇파장=소장판사들이 법원행정처 등으로부터 집단행동을 할 경우 엄중문책하겠단은 경고를 받았음에도 성명서까지 내게된것은 국민들의 사법부에 대한 불신이 경계수위에 이르렀다는 위기의식에서 비롯된 것으로 풀이된다.
의견서는 『사법부의 권위가 법정에서조차 유지되지 못하는 참담한 사태를 맞이하기에 이르렀고 사법부에 대한 국민들의 불신은 차라리 냉소에 가까운 것이 돼버렸다』고 표현하고 있다. 의견서는 이어 『국민들의 불신은 점점 커져 판사들을 의혹에 찬 눈으로 보기 시작했으며 사적분쟁의 해결에서조차 사법부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며 사법부에 대한 불신풍조를 우려했다.
사법부 개혁과 반성은 올들어 서울 서부지원 김종훈판사와 대구지법 신평판사의 사법부 개혁을 촉구하는 기고문을 통해 간간이 제기돼 왔었다.
그러나 이번 서울 민사지법 소장판사들의 성명서는 40명 전원이 투표한끝에 대법원장에게까지 전달된 것으로 가장 보수적인 집단중 하나인 법관들이 혹시 있을지도 모르는 인사상의 불이익을 감수해가며 집단행동을 감행했다는데 의미가 있다.
판사들은 지난달 17일 단독 판사회의에 앞서 예비모임을 가졌을 당시 사법부의 부끄러웠던 과거를 구체적인 문건을 통해 짚고 넘어가야 한다는 주장을 폈으나 법원장에게 전달한 건의서에 과거청산 내용은 빠졌었다.
판사들은 지난 19일 다시 모임을 갖고 장장 8시간에 걸쳐 격론을 벌인 끝에 사법부 개혁을 위해서는 먼저 권력에 영합했던 과거 사법부의 행태에 대해 국민앞에 속죄해야 한다는데 의견일치를 보았다.
구체적인 문건을 만들어 대법원장에게 전달하는데는 일부 이견이 있어 단독 판사 40명 전원이 참석한 가운데 투표를 실시,찬성 28명으로 의견서를 올리는 것으로 결정됐다.
판사들은 자신들의 이번 행동이 자기몫에 대한 욕심에서 나오는 직급이기주의 또는 조직을 파괴하는 소수 법관의 돌출행동으로 비춰지지 않기를 바라고 있다.
○대법원 유감표명
대한변협 등 재야 법조계에서도 이번 사건이 사법사상 드문 법관들의 단체행동이라는데 주목하면서 곧 입장을 정리해 성명을 발표할 방침이어서 법조계 전체로 파장이 번질 전망이다.
◇대법원장=법원행정처 서성 기획조정실장은 『비록 비공식적이고 소수의 의견이긴 하지만 일단 법원행정 개혁을 위한 참고사항으로 받아들이겠다』는 입장이다. 서 실장은 그러나 법관들의 의견은 법원장 회의에서 이미 논의되었고 대법원장도 알고 있는 사항이라고 지적,『판사들이 집단행동을 통해 의견을 표출하는 것은 유감』이라는 뜻을 밝혔다.<정철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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