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복무 43년 정육진대령/6·25 “최후의 용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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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17세때 학도병 사선누빈 “불사조”/월남전서도 용맹… 무공훈장 받아/77년부터 3사관학교 교수로 강의
『단 하루를 살아도 남아답게 살겠다고 다짐해온 군생활이 어느덧 43년이 되었습니다. 전후세대들이 6·25전쟁의 아픔을 제대로 이해하고 월남전 참전에 대한 부정적 시각에서 벗어났으면 하는 것이 제 마지막 소망입니다.』
「최후의 6·25참전 용사」 정육진대령(60·육군 3사관학교 교수). 그는 육·해·공군·해병대를 통틀어 6·25 참전용사중 유일한 현역이다.
8월30일이면 42년 8개월만에 최장수 현역복무기록을 남기며 군문을 떠나게 되는 노병은 다시는 이 땅에 6·25와 같은 비극이 있어서는 안된다고 강조한다.
정 대령이 군에 입대한 것은 6·25전쟁이 일어난 1950년 12월. 당시 서울 한성중학교 5년생이던 그는 17세의 어린 나이에 학도병으로 입대,불과 1주일동안 훈련을 받고 최전방 소총병으로 참전했다. 육군 제8사단에 배속돼 처음으로 강원도 횡성전투에 투입된 이후 몇 고비의 사선을 넘었으며 51년 8월엔 그 유명한 김일성고지(965고지) 탈환작전에 참가했다.
쏟아지는 장대비속에 고지를 뺏고 빼앗기길 수십차례 거듭한 처절한 격전에서 8사단 2개 연대병력이 장렬하게 산화했으나 그는 불사조처럼 살아남았다.
1953년 9월 갑종간부 57기로 육군 소위에 임관된 그는 일선 소대장과 작전·군수·정훈장교를 두루 거친뒤 62년엔 국비장학생으로 단국대 법대를 졸업하고 미 육군 특수전학교 심리전과정의 유학을 다녀오기도 했다. 정 대령은 65년 10월 맹호부대 정훈장교(대위)로 월남전에 참전,유창한 영어실력으로 외신기자들에게 주월한국군의 현지 월남주민들에 대한 영농지원과 노인위안잔치 등 인도적인 선무작전을 소개했으며 이같은 활동이 당시 런던타임스지 1면에 「고보이전투의 교훈」이라는 제목으로 크게 보도되면서 사이공주재 외신기자 4백50여명이 경쟁적으로 한국군의 전투상황을 소개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채명신 주월 한국군사령관은 『이같은 외신보도로 베트콩 1개사단을 섬멸한 이상으로 한국군의 국제적 위상을 크게 높였다』며 그에게 화랑무공훈장을 수여했다.
2년만에 귀국한 그는 70년 중령진급과 함께 주월한국군사령부 대변인으로 다시 월남전에 참전,최전방을 누비며 생생한 기록사진을 직접 촬영해 외신기자들에게 배포한 공로가 인정돼 또 다시 화랑무공훈장을 받았다.
정 대령은 77년이후 줄곧 3사관학교 교수로 「현대의 이데올로기」 「공산주의 전략전술론」을 강의해오고 있으며 현역장교중 최고참 대령의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정 대령은 정년을 못내 아쉬워하면서 공로휴가도 마다하고 퇴임하는 날까지 출근을 고집하고 있다.
부인 김영옥씨(57)와의 사이에 1남2녀중 장남 해찬씨(35)가 서울대 공대 전자공학과를 졸업,현재 미국 리하이대에서 박사코스를 밟고 있어 가슴 뿌듯하다는 그는 퇴임후 「한국전사」 편찬과 대학출강도 계획하고 있다.<영천=김선옥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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