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 기자 구속사건을 보고…/이석연 헌재 헌법연구관·법박(기고)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명예훼손 처벌엔 악의입증 필요/사실로 믿고서 보도했을땐 면책/검찰권 행사는 신중하고 공평하게
검찰은 5,6공에 걸쳐 최대 의혹사건인 율곡사업에 대한 감사원 조사 과정에서 권영해 국방부장관이 출국금지자 명단에 포함되었다는 중앙일보 기사와 관련하여 권 장관의 고소로 기사를 작성한 정재헌기자를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 혐의로 전격 구속함으로써 명예훼손죄의 성부를 둘러싼 논쟁이 최근 새롭게 일고 있다.
명예훼손죄는 사람이 사회생활에서 가지는 인격적 가치를 보호하는 범죄로서 특히 형법은 제309조에서 사람을 비방할 목적으로 신문·잡지·라디오 기타 출판물에 의하여 공연히 사실(또는 허위의 사실)을 적시하여 사람의 명예를 훼손한 경우에 그 형을 가중하는,이른바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죄를 규정하고 있다.
현대와 같은 정보화사회에서 근거가 확실하고 명예를 침해하지 않는 정보만을 유통시켜야 한다면 표현의 자유와 국민의 알권리가 제대로 충족되지 않아 민주사회의 토대인 건전한 여론형성에 지장이 초래되므로 어느 정도 불확실한 정보라도 유통시킬 필요성이 대두된다. 한편 언론·출판 등의 표현의 자유는 자유민주주의의 제도적 기초로서 이는 비판의 자유를 그 본질로 하고 있다. 바로 이러한 측면에서 형법은 또한 제310조를 두어 개인의 명예보호와 표현의 자유의 조화를 모색하고 있다.
이 경우 비록 적시된 사실이 허위일지라도 그것을 진실한 사실로 믿고 오로지 공공의 이익을 위하여 적시한 때에는 명예훼손이 되지 않음은 물론이다.
특히 출판물에 의한 보도의 내용이 공적인 사항이나 공적인물에 대한 경우 그로인하여 특정인이나 특정기관의 명예를 떨어뜨리더라도 그것이 국민의 알권리의 충족이라는 면에서 진실성과 공익성에 부합된다면 개인의 인격보호에 주안을 두고 있는 형법상의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죄를 그대로 적용할 것인지에 대하여는 강한 의문이 제기된다. 가령 보도된 사실이 증명하기 어려운 문제점을 안고 있다거나 또는 오신에 의한 보도라 하더라도 명예훼손의 책임을 묻는 데에는 신중을 기해야 하리라고 본다. 왜냐하면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의 과다한 적용 내지 남적용은 특히 권력형 비리나 대형 부정부패 의혹사건 보도에 대한 무형의 사전 압력 수단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있어 표현의 자유와 국민의 알권리를 원천적으로 봉쇄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하여 공적 사항이나 공직자에 대한 비판적 보도가 명예훼손으로 처벌되려면 그 보도가 실질적인 악의(Actual Malice)에 의한 것이 입증되어야 하며 그 거증책임은 공무원측에 있다는 미국연방대법원의 확고한 판례의 입장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하겠다.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죄가 지니는 이와같은 원론적인 문제점은 접어 두고라도 이번 사건에서 정재헌기자에게 명예훼손의 책임을 물으려면 공연히 명예를 훼손한다는 인식(명예훼손의 고의)과는 별도로 먼저 출국금지 관련기사에 의해서 권 국방장관을 비방하겠다는 목적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처음부터 허위의 사실을 진실로 오인한 경우에는 그 오인에 정당한 이유가 있는 한 공연히 허위의 사실을 적시한 경우(형법 제307조 제2항)에도 해당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보도가 오로지 공공의 이익에 관한 것일 때에는 명예훼손죄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점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비방의 목적과 허위라는 인식이 있었다는 점,그 보도가 공공의 이익과 무관한 것이라는 점에 대하여는 모두 검찰측에 그 거증책임이 있다는 것이 형법학의 최근 이론 동향이다.
결국 정 기자가 보도한 내용이 신정부의 개혁정책 일환으로 지대한 국민적 관심속에 진행되고 있는 감사원의 율곡사업관련 감사와 관련한 공적 인물의 출국금지 사실에 대한 보도였고 그 보도경위가 출입국관리관련 공무원으로부터 「법무부 출국규제자」 제하의 문건을 입수한 관계로 그 내용이 사실인 것으로 믿었다는 취재보도 경위기사(중앙일보 6월14일자)에 비추어 볼때 비방의 목적이 있었다고 보기 어렵거니와 더 나아가 당시 상황으로서는 출국금지자 명단이 사실이라고 믿을 만한 상당한 이유도 있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한다.
정 기자에 대한 전격 구속수사 자체에 대한 현실적 타당성에 대한 논의는 차치하고라도 실제로 검찰로서는 법리상으로도 명예훼손죄를 적용하여 공소를 유지하는데 많은 부담을 지고 있다는 점에서도 이 사건에서야 말로 신중하고도 공평한 검찰권의 행사가 요청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