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 '제41기 KT배 왕위전' 긴 소송에 휘말리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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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제41기 KT배 왕위전'

<도전기 3국 하이라이트7>
○ . 윤준상 6단(도전자) ● . 이창호 9단(왕위)

장면도(86~100)=이창호 9단이 '집'을 향해 '날렵하게' 움직인 적은 거의 없다. 그러니까 흑▲로 이 부근에 세 수나 들인 것은 이창호 9단다운 느릿함이라고 말할 수 있다. 속으로 뼈저린 두터움의 힘이 갈무리돼 있는 이창호 특유의 수법 말이다. 이 바람에 철벽 위용을 자랑하던 이곳 백이 곤마 비슷할 정도로 약해졌다.

하지만 이 대목에서 김지석 4단 등 젊은 기사들은 "너무 두터운 것 아닌가요" 하며 조심스럽게 이의를 제기한다. 흑▲들과 같은 시점에 놓인 백△들은 외관상으로도 날렵하고 손에 잡히는 현찰이라는 점이 이들의 의구심을 부채질하고 있다. 스피드와 두터움은 바둑의 영원한 숙제이고 갈등이다. 정답은 없고 사람마다 느낌의 차이만 존재한다.

여기까지가 바둑학적인 고뇌라면 90과 92는 너무도 현실적인 수읽기 문제를 보여 준다. 수가 없다고 믿었던 우하귀. 그러나 윤준상 6단은 90, 92의 끈질긴 수법으로 생명의 싹을 틔워냈다.

93에 이어 95의 치중이 최선의 대응책이었지만 96, 98로 끈덕지게 버티자 백의 목숨을 그냥 거둬들일 수 없다. 소위 한 수 늘어진 패. 프로바둑에서 한 수 늘어진 패는 패 취급을 못 받는다. 그런데도 이 장면은 우세하게 판을 이끌어 온 이창호 9단의 가슴에 그림자를 던지고 있다. 어둠 속에서 발목을 잡아채는 꺼림칙함이랄까. 한없이 길게 이어질 소송에 휘말리는 느낌이랄까.

한 수 늘어진 패는 무시하는 게 관례인데 이 패는 무시할 수 없다. 손 빼면 A의 절단이 있다. 그렇다고 흑이 '참고도' 흑1로 받아 준다면 백2로 두어 바로 단패가 된다.

박치문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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