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아이] 김정일의 독백(獨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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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안정과 정치개혁의 어려움을 안고 새해를 맞이한 우리 못지않게 북한의 고난의 행군도 이어진다. 김정일 체제가 끄떡없다는 분석에도 불구하고 북한은 그 어느 때보다 체제 존립의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해 봐야 하는 상황이 다가오고 있다는 느낌을 받고 있을지 모른다. 김정일 위원장의 새해 고민과 구상은 무엇일까. 그간의 정황을 참고로 金위원장의 독백(獨白)을 짜맞춰 보면….

"지난해 말의 충격이 쉽게 가시질 않아. 이라크의 후세인이 허망하게 잡히고 우리한테 그 많은 무기를 사들였던 리비아의 카다피조차 이를 모두 포기하겠다니 그래 가지고 지도자 행세해 왔다는 게 믿기질 않아. 하기야 겉으론 핵무기다, 생물.화학무기다 거들먹거리며 미국과 한판 벌이자고 떠들었지만 실제 별로 가진 것 없다는 게 들통날 판이었으니 딴 길이 없었겠지. 적어도 나는 그렇게 당하진 않아. 우리 수령님께서 반세기 넘도록 외세와 싸우며 일궈낸 공화국을 무너뜨릴 짓은 결코 하지 않을 것이야. 우리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강성대국의 기치 아래 똘똘 뭉친 인민들의 결의가 있지. 또 미국도 무시 못할 핵병기를 갖고 있지 않은가. 사실 써보지 않았으니 필요할 때 움직일는지 모르나 우선 그네들이 우리 힘을 믿어주니 당장은 버틸만 해. 게다가 고농축 우라늄을 이용한 핵무기 개발도 언젠가는 적당히 바꿔 먹을 기회가 올 것이야. 어떤 경우든 우린 절대 남에게 무시당하는 꼴을 참을 수도 없고 또 그리 당하지도 않을 것이야.

한데 세계에서 제일 세다는 미국이 왜 우리에게는 그토록 까다롭게 구는 거야. 우리가 핵활동을 동결하고 시험도 수출도 하지 않을 테니 체제 담보해 주고 경제적으로 조금 도와달라는 데 왜 그리 인색한지. 세상에서 나만큼 탄탄한 지도자가 없다는 사실을 잘 알터인데 어떻게든 나를 흔들어 놓을 심사가 아니라면 이렇게까지 밀어붙이기로 나와선 안 되는 것 아냐. 아무튼 정신 바짝 차려야 해. 올해 말 선거가 있다고 해서 혹시 부시가 떨어지고 좀더 만만한 상대가 들어설는지 몰라 시간벌기로 나가볼 참이었는데 최근 보고받으니 그럴 가능성이 없는 것 같아. 결국 부시란 자와 한판 승부를 벌여야 할 모양이구먼.

1994년 조.미합의에서 핵문제 타결은 봤지만 우리가 약속 어겼다고 미국이 주장하는 모양인데 그때 미측 대표였던 갈루치도 나중에 실토했잖아. 공화국이 오래 버티지 못할 터인즉 미국은 약속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말 아닌가. 그런 상대를 믿고 공화국을 방어할 수단을 개발하지 않고 손놓고 있었다면 우리 수령님이 나를 얼마나 꾸짖으셨을까. 주변을 둘러봐. 이스라엘도 공표는 안 했지만 핵무기를 갖고 중동의 큰 나라들 틈바구니에서 기죽지 않고 살고 있지. 미사일 만드는 데 우리가 도와줬던 파키스탄도 핵무기 갖고 '배째라'식으로 나왔을 때 미국이 결국 인정해 주고 말았잖아. 그런 게 미국이야. 만만한 상대는 무시하고 정작 담대한 이들과는 타협하는 게 미국이라고.

그런데 과연 올해를 조용히 넘길 수 있을까. 올 6월이 고비인 것 같아. 그때쯤이면 부시의 재선 여부가 좀더 확실해질 것이고 남조선도 총선 끝나고 어디로 튈는지 대략 그림도 그려질 터이니. 하기야 이젠 남조선 동무들이 미국편에 서서 우리와 싸울 생각은 버린 것 같아. 갈수록 우리에게 떨떠름하게 구는 중국만 잘 구슬리면 일단 일괄타협을 통해 당장 급한 경제원조부터 받아내고 핵사찰이다 뭐다 하는 건 시간걸리는 일이니 우리가 크게 손해볼 일은 없을 게야. 아무튼 이럴 때일수록 수령님의 지혜가 간절하구먼."

올 한해 북핵 문제는 이렇게 다시 시작된다.

길정우 통일문화연구소장 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