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레반 뒤에 '양귀비'가 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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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레반의 주요 돈줄인 양귀비 재배를 차단하라."

미국과 아프가니스탄 정부가 새로운 대(對)탈레반 작전을 거론하고 있다.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도 6일 하미드 카르자이 아프간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마친 뒤 그런 입장을 언급했다. "아프간 농부들이 양귀비가 아닌 다른 작물을 재배할 수 있도록 돕고 대신 양귀비를 뿌리 뽑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이 발언에는 탈레반의 돈줄이 되고 있는 양귀비를 근절해야 아프간 문제를 풀 수 있다는 미국 정부의 인식이 깔려 있다. 최근 미국과 영국 주도의 다국적군이 아프간 남부 헬만드주를 집중 공습하는 것도 같은 차원에서 해석된다. 아프간 양귀비의 42%가 헬만드주에서 재배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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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가니스탄 농부가 동부 낭가르하르주 바티코트 지역의 양귀비 밭에서 유액을 채취하고 있다. 이 유액을 굳히면 생아편이 된다.[바티코트 AP=연합뉴스]

◆양귀비는 아프간의 석유=아프간은 지난해 전 세계 아편의 92%인 7286t을 생산했다. 전년에 비해 43%나 늘어난 것으로, 역대 최고의 작황이다. 올해도 15% 늘어나 세계 생산량의 95%를 차지할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아편을 통해 얻는 수입이 아프간 국내총생산(GDP)의 절반인 30억 달러를 넘어설 정도로 양귀비는 '아프간의 석유'로 불린다.

급증하는 양귀비 판매 수입은 대부분 탈레반과 지역 군벌 등 무장세력들에 흘러 들어가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집권 당시 양귀비 경작을 금지했던 탈레반도 지금은 간섭하지 않는다. 대신 이들은 농민들로부터 세금을 거둔다. 마약 밀매업자들도 탈레반에 매달 일정액을 상납하고 있다고 한다.

이 돈으로 탈레반은 이란의 암시장에서 무기를 구입하고, 신병을 충원하면서 세력을 확대한다. 탈레반 대원과 마약 소탕작업을 벌이는 경찰관의 월급 차이가 벌어져 양귀비 퇴치 작업이 지지부진하다는 분석도 있다. 아프간 경찰과 정규군의 월급은 60~70달러지만, 탈레반 초급 대원은 200달러를 받는 것으로 알려졌다.

◆양귀비 근절 가능한가=미국 워싱턴의 싱크탱크 뉴아메리카연구소 선임연구원인 피터 버겐은 최근 '미국이 아프간에서 저지른 10가지 실수'를 지적했다. 그중 하나가 '아편 퇴치에 골몰해 양귀비 재배농가를 적으로 돌렸다'는 것이다.

미국은 마약을 뿌리 뽑겠다며 양귀비 재배를 강하게 제재했지만 아프간 사람들은 그 취지에 공감하지 않았다. 양귀비는 아프간 남부에서 재배 가능한 유일한 작물이다. 대체작물이 가능한 다른 지역에서 밀을 심을 경우 수입은 4분의 1로 줄어든다. 이 때문에 양귀비에 대한 강경 대책을 추구하는 미국과 달리 아프간 정부는 농부와 국민여론의 반발을 우려, 가혹한 제재를 꺼린다. 4억7500만 달러에 이르는 아프간 마약 퇴치 프로그램도 부시 행정부와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 동맹국 간 이견으로 발표가 여러 차례 연기되고 있다.

국제 민간 싱크탱크인 센리스 위원회는 대안으로 양귀비 재배 허가제를 제안했다. 허가를 받고 재배한 양귀비로 모르핀.코데인을 비롯한 합법적인 의약품 원료를 생산해 농민들이 무장세력과 단절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줘야 한다는 것이다.

원낙연 기자

◆양귀비=지중해 동부가 원산지인 양귀비과 식물이다. 당나라 현종의 후궁으로 소문난 미녀였던 양귀비에 비길 만큼 꽃이 아름답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덜 익은 열매에서 얻은 유즙을 말리면 마약인 아편을 만들 수 있다. 각종 통증과 기침.설사.발열 등에 효과가 있어 의약품 원료로 사용되기도 한다. 환각작용이 있는 데다 습관성이 강해 쉽게 중독되며 금단현상이 있어 끊기도 쉽지 않다. 이 때문에 한국을 비롯해 많은 나라에선 재배가 불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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