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왕 무릎 꿇은 '임나일본부설' 일본 족자 미국 박물관서 전시 물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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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미국 유수의 아시아 박물관에서 일본의 대표적 역사왜곡인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을 그린 두루마리 족자를 전시해 물의를 빚고 있다.

문제의 족자는 샌프란시스코 아시아 박물관(관장 에밀리 사노)에 전시된 ‘하치만 신과 그를 모신 신사에 관한 이야기(Stories of the Shinto Deity Hachiman and Shrines Dedicated to him·1389년작)’다. 여기엔 4세기 일본의 진구황후(神功皇后)가 왜군을 이끌고 신라를 정벌했다는『일본서기(日本書紀)』의 내용을 그린 장면(사진)이 들어 있다. 그림 옆에는 “한국 남부의 신라왕국과의 전쟁에서 남편을 잃은 진구황후가 마법의 돌을 얻어 신라와의 복수전에서 이기는 장면. 갑옷을 입은 황후가 신라 왕을 무릎 꿇리고 있다”는 설명이 붙어 있다. 가로 14m, 세로 30㎝로 긴 이 두루마리에는 일본군이 용을 앞세워 신라군을 정벌하는 장면도 있다.

샌프란시스코 아시아 박물관은 수도 워싱턴의 프리어 갤러리와 함께 대표적인 아시아 박물관으로 꼽힌다. 이 박물관에서는 일본·인도 등 아시아 각국의 이야기 그림을 특별전시 중이다. 이 전시에 한국 작품은 없다.

현지 한인사회에선 이 그림을 두고 논란이 거세다. 한인들의 제보를 받은 샌프란시스코 총영사관측은 지난달말 박물관에 서한을 보내 시정을 요구했다.

이에 박물관은 전시 그림 옆 설명에 “이 장면은 한국인 및 한인 관람객들의 분노를 사고 있다. 박물관은 이 분들의 감정을 상하게 한 것을 유감으로 생각한다…이들은 전시된 족자를 치워줄 것을 요구했지만 우리는 교육적인 목적을 위해 다양한 견해를 나누는 한편 그 견해 차이를 공개하고자 한다”는 내용의 시정문을 추가로 게시했다.

전시를 담당한 포레스트 맥길 큐레이터는 미주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전설 등 설화 전시회라 문제가 없을 것으로 생각했다”며 “항의를 받아들여 시정문을 게시했지만 전시된 그림을 내릴 의향은 없다”고 밝혔다. 아시아 설화전에 한국 작품이 한 점도 없는 것에 대해선 “역동적으로 이야기를 그려낸 작품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해명했다.

샌프란시스코 한인회 이석찬(48·사업) 회장은 6일 “이것은 단순히 한일간의 견해 차이의 문제가 아니다. 관람객들이 일본의 신라 정벌을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일 우려가 있다”고 지적했다. 한인회 등 한인단체들은 박물관측에 이 그림을 전시하지 말 것을 계속해서 요구할 방침이다. 전시는 10월 21일까지다.

권근영 기자,샌프란시스코 지사 송병주 기자

◆임나일본부설=4세기 후반 일본이 한반도 남부에 진출해 백제·신라·가야를 지배하고, 특히 가야에는 일본부(日本府)라는 기관을 둬 6세기 중엽까지 직접 지배했다는 설이다. 4세기 당시 일본이라는 국호가 없었다는 반론에도 불구하고, 일본에선 이를 20세기 식민지배를 정당화하는 근거로 삼아 뿌리깊은 논쟁거리가 돼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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