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후남기자의영화?영화!] 거장 세 분이 떠났습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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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아는 감독 여럿이 최근 세상을 떠났습니다. 개인적으로 알고 지냈다는 게 아니라, 영화 팬이라면 대충 알 만한 감독들이라는 뜻이지요. 약속이나 한 듯 지난달 30일 나란히 세상을 떠난 스웨덴의 잉그마르 베리만과 이탈리아의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는 그야말로 현대영화를 논할 때 반드시 거론되는 거장입니다.

 봉준호 감독의 ‘살인의 추억’이 결말에 살인범이 잡히지도, 정체가 밝혀지지도 않는 독특한 영화라는 게 기억나시나요? 안토니오니의 ‘정사’(1960년)는 여자가 실종되는데, 찾기는커녕 실종된 경위조차 도무지 밝혀지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칸영화제에서 처음 상영됐을 때 관객들의 야유과 유명감독들의 지지선언을 번갈아 받은 화제작이었다고 합니다. ‘욕망’(66년·원제 Blow Up)도 비슷한 데가 있네요. 사진작가가 우연히 찍은 사진을 확대해 보니 수풀 속에 시체가 보이는데, 정작 현장에는 아무런 흔적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안토니오니의 영화에는 곧잘 ‘모던하다’는 수식이 따라붙곤 합니다.

 박찬욱 감독의 ‘친절한 금자씨’는 상업영화이면서도 구원과 속죄라는 종교적 주제를 다룬 영화입니다. 베리만은 반세기 전쯤에 죽음과 구원의 문제에 천착한 영화 ‘제7의 봉인’(57년작)을 내놓았습니다. 은퇴작인 ‘화니와 알렉산더’(82년)처럼 경쾌한 작품까지 포함, 베리만은 왕성한 활동으로 영화라는 신생 장르에 철학적·심리적 깊이를 더해준 감독으로 꼽힙니다.

 이에 한 달쯤 앞서 대만 감독 에드워드 양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60세로, 암투병 중이었다고 하네요. 개인적인 서운함이 컸습니다. 각각 94세, 89세였던 앞서 두 감독에 비해 천수를 누리지 못한 데다, 눈높이에서 보는 맛은 그의 영화가 더 컸던 까닭이지요. 아시아적·동시대적 공감대라고나 할까요. 분단과 급속한 산업화를 경험한 대만과 한국의 공통점도 작용했겠지요.

 ‘하나 그리고 둘’(사진·2000년)은 그의 마지막 작품입니다. 갑작스레 쓰러진 할머니의 병구완에 힘들어하는 가족들, 회사의 경영난을 헤쳐가는 와중에 첫사랑을 다시 만나 한눈을 파는 가장, 부모가 모르는 새 연애문제로 괴로워하는 딸 등 그야말로 우리네 가족드라마에서 곧잘 만날 법한 얘기가 엮어집니다. 심각한 예술영화가 아니라 TV의 통속드라마를 닮았지요. TV를 폄하하려는 게 아니라 그만큼 재미있다는 겁니다. 그 재미의 끝에 통속의 세상을 견뎌가는 지혜가 뭉클하게 느껴집니다.

 100년을 조금 넘는 영화역사의 전반부에는 열등감도 적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문학·연극 같은 선배 장르의 아류나 단순한 오락물이 아니라 새로운 매체로서 예술적 가능성을 확인하려는 대담한 시도가 빛나곤 했지요. 이제 다시 보면, 영화 역시 일종의 이야기란 생각이 듭니다. 훌륭한 이야기꾼들이, 더 들려줄 얘기가 많았을 것 같은 이야기꾼이 가버린 게 아쉽군요.

이후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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