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씨배 뒷얘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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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순국산 서봉수9단이 마침내 한을 풀었다. 제2대 황제로 등극한 것이다. 그동안의 숨은 얘기를 간추려 소개한다.
필자는 한국팀의 단장 자격으로서 9단과 함께 싱가포르에 다녀왔다. 그곳 교민들의 동포애는 영원히 잊지 못할 만큼 뜨거웠으며, 중국바둑계 인사들의 응원도 일방적이었다. 차례로 찾아와『워 시왕 쉬신성 콴쥔(서선생의 우승을 바랍니다)』이라고 했고, 루이네웨이(예내위)9단은 요즘 한글을 배운다며 종이에「곡 이져요」라고 써가지고 와서 서9단을 감격시켰다. 한글이 서툴러「꼭」을「곡」으로 썼던 것.
한편 오타케 히데오(대죽영웅)9단은 시합전은 물론 우승을 놓치고도 유머감각과 의연한 태도를 잃지 않아 그가 비록 일본인이지만 마음속 깊이 존경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서9단은 「응씨배」에 한이 맺힌 사람이다 .88년의 제1기때는 한국기원의 외교 부재로 참가하지 못하고 유일한 후보선수로 명단에만 올랐으며, 이번 제2기에는 유창혁과 경합이 붙어 한국기원에서 6개월 이상 끄는 바람에 비록 겉으로 드러내진 않았지만 자존심을 크게 상했으리라는 점을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아무튼 서9단은 이번 세계 제패로 그 응어리진 한을 말끔히 씻었다. 그야말로「한풀이의모범답안」을 보여 주었다고나 할까. 당연직으로 참가한 조훈현·이창호는 물론 경합 상대였던 유창혁(중국선수의 불참으로 양재호8단과 함께 참가)을 뛰어넘어 영광을 차지했으니 말이다. 서9단의 한풀이는 남을 미위하기 보다는「자신의 극복」으로 이루어진 것이어서 더욱 돋보인다.
서9단은 누구보다 먼저 이창호의 실체를 솔직히 인정하고「이창호 연구」에 진력하기도 했다. 『요즘 한국기원 연구생이나 연구생출신 10대 기사들은 너무나 행복하다. 이창호와 뿅뿅(전자오락)을 놀아주고 김밥과 떡볶이를 나누며 무제한으로 거저 배우고 있다』『중년의 대가들도 바둑이 늘고 싶으면 권위주의에서 벗어나야 한다. 뿅뿅을 익히고 식성을 바꿔 이창호와 어울려라.』 서9단의 말이다.
사실 그는 이창호의 대국날이면 빠짐없이 나와 하루종일 연구 검토하다가 대국이 끝나면 의문점을 물어 챙기더니 제2기「동양증권배」결승 5번 승부에서 이창호에게 1패후 3승으로 우승했었다. 그렇게 세계 3대 프로기전중의 하나인 동양증권배를 획득하고도 당시 천하를 호령하던 서훈현의 그늘에 가려 크게 각광받지 못했었다.
서9단은 이번 응씨배 우승으로 안타까웠던 과거의 굴레를 벗고 세계 최고봉에 우뚝 섰다. 그의 인간승리에 갈채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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