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곡어법(분수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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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언어학에 완곡어법이란 용어가 있다. 있는 그대로 포현하면 듣는 사람이 불쾌감을 느낄 염려가 있는 사실이나 생각 등을 다른 말로 돌려 나타내는 언어기법이다. 「죽었다」를 「밥숟가락을 놓았다」라고 말하는 식이다.
오스트레일리아에서는 「소변보다」는 「말(마)에 물을 주다」로,「성교하다」는 「병원놀이를 하다」라고 표현한다. 그래서 완곡어법을 미어법 또는 둘러대기라고도 한다.
요즈음 흔히 쓰이고 있는 것으로 「사법처리」라는 말이 있다. 거물급 인사가 무슨 혐의로 수사기관에서 조사받다가 사법처리될 것이라고 하면 구속된다는 뜻이다. 지위가 높은 사람은 쇠고랑을 차면서도 용어에서부터 대접을 받는 셈이다. 「미래지향적」 또는 「전향적」은 과거의 잘못은 이쯤으로 덮어두자는 뜻으로 쓰일 때가 많다.
요즈음 신문지면에는 ㄱ,ㅅ,ㅇ,ㅈ이나 J,K,L,S,Y따위의 무슨 추리소설 암호같은 문자들이 자주 등장한다. 불명예스런 일로 구설수에 오른 지체높은 사람들 이름의 두문자들인데 그들의 명예를 위해 동원된 완곡어법의 일종이다. 그 도깨비놀음 같은 문자 뒤에 숨는 당자사보다는 그로 인해 연상되는 사람들의 억울한 피해가 훨씬 더 많을 것이다.
완곡어법은 반어법에서처럼 말하고자 하는 뜻과 정반대가 되는 단어나 문장으로 확대될 수도 있다고 언어학자들은 규정한다.
한때 수사기관이 강제연행을 하면서도 「임의동행」이라고 강변했던 것은 반어법적으로 쓰인 완곡어법의 백미가 아닐 수 없다. 요즈음엔 도피성 외유를 「신병치료차」 「세미나 참석」 「강연회 초청」이라고 둘러대는 오리발적 완곡어법이 유행인듯 하다.
정치인들이 자기의 발언에 말썽이 나면 일단 「와전」이라고 시치미를 떼는 것은 기자들을 눈도 귀도 없는 바지저고리로 몰아붙이는 대신 자기의 실수를 순간적으로나마 모면해 보자는 얌체성 완곡어법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최근 자주 쓰이는 「성역없는 사정」이니 「물증이 없다」 또는 「표적수사」라는 말이 진싸 성역보호를 위한 반어적 완곡어법이 아닌가 의아해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고 보면 완곡어법이란 정치나 인간의 2중성을 노출시키는 한 단면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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