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노재현시시각각

참으로 편리한 ‘미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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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에, 협상장 주위에 모인 시위대가 고작 6명이라면 너무 심하지 않나요?”

 필리프 티에보 주한 프랑스 대사가 5월 한국·유럽연합(EU) 자유무역협정(FTA) 1차 협상이 끝난 뒤 한국 기자에게 털어놓은 불만이다. 그는 “한·미 FTA 협상 때는 그렇게도 수많은 사람이 시위를 하고 격렬하게 국가적 논쟁을 벌이더니, EU와의 협상에는 왜 그렇게 무관심합니까”라며 미국에 대한 한국인의 지나친 관심을 꼬집었다고 한다. 한국인은 무슨 일이든 미국만 들어가면 상식 밖의 대단한 관심을 보인다는 것이다.(5월 28일자 한국일보)

 티에보 대사는 주재국 사정에 밝다. 따라서 그의 발언은 우리 사회 ‘반미 장사꾼’을 향한 통렬한 풍자였을 것이라고 나는 짐작한다. ‘미국’만 들어가면 조건반사처럼 머리띠 두르고 나서는 사람들이 일상의 풍경으로 자리 잡은 지 꽤 됐다. 광우병 파동 전 국내 쇠고기 시장의 44%를 차지하던 미국산 쇠고기가 파동이 마무리돼 다시 들어오려 하자 할인점 매장에 쇠똥을 뿌리는 일이 빚어졌다. 그러나 코 막고 쇠똥을 모으던 사람들이 우리 식탁에 넘쳐나는 벨기에·스페인산 돼지고기나 호주산 쇠고기에는 아무런 말이 없다. 우리 배 골든로즈호를 중국 진성호가 들이받아 무려 16명의 귀중한 생명이 스러졌는데도 중국대사관 앞에서 시위 한 번 벌어졌다는 소리를 못 들었다. 가해자가 미국 배였다면 반미 장사꾼들이 벌떼처럼 들고 일어났을 것이다.

 미국이라고 잘못이 없다는 얘기도 아니고, 힘센 나라니까 매사 그냥저냥 넘어가자는 말도 아니다. ‘미제(미 제국주의)’를 편리하게 이용하는 사람들의 사고방식이 내가 보기엔 ‘민족모순’과 ‘계급모순’의 배합 비율을 놓고 티격태격하던 1980년대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상황은 바뀌었는데 생각이 그대로라면 누구나 마음이 불편해진다. 어려운 말로 인지부조화(認知不調和)다. 그래서 상황이든 생각이든 어느 한쪽을 다른 쪽에 일치시켜 불편함에서 벗어나려 한다. 반미 장사꾼 중에는 ‘미제’를 최대의 적으로 여기던 80년대 생각에 요즘 상황을 우격다짐으로 구겨 넣으려는 사람이 많다. 스스로는 일관성을 갖춘 투사라고 자부하고 싶겠지만, 제삼자가 보기엔 블랙 코미디의 연속이다. 벨기에산 돼지고기와 미국산 쇠고기, 진성호와 미군 장갑차 간의 모순이 그들 눈에는 보이지도 않는다. 아니, 처음부터 보고 싶지 않았는지 모른다. 그런 점에서 운동장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 빼앗기게 된 서울 덕수초등학교 학부모 대표의 한마디는 정말 날카롭다. “민주화 운동을 했던 명망가들은 2005년 미국이 덕수초등학교 인근에 주한대사관을 지으려 했을 때 덕수궁 터에는 안 된다며 반대했습니다. 그런 분들이 이제 그 터에 기념관을 짓겠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행동입니다.”

 ‘미제 반대’를 세상의 중심축에 놓는 사람들이 며칠 전부터 아프가니스탄 피랍 사건에 개입하기 시작한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보름 가까이 참아준 것만도 대견하다). 사건 발생 열흘 만에 북한 노동신문이 먼저 입을 뗐다. ‘(한국 정부가) 석방 교섭을 한다고 소동을 피우고 있다’ ‘남조선 당국이 미국의 날강도적인 반테러전에 추종하는 한 납치 사건은 아무 때나 계속 터지게 돼 있다’…. 거의 악담 수준이었다. 남한에서는 온 가족이 미제에 유학하거나 미제 회사에 취직하거나 미제 군대에 복무한 한 대학교수가 “탈레반이 인질 교환을 안 하는 건 테러 국가와는 협상하지 않는다는 미국 때문”이라고 군불을 때고 나섰다. 그러자 평택 미군기지, 이라크 파병, 제주도 해군기지, 한·미 FTA 반대 시위에 개근하던 단체들이 들고 일어나 미국을 탓하기 시작했다. 미국이 인질 협상에 일정한 영향력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마치 사건 발생 보름 만에 처음 깨달았다는 듯이. 그들에게는 북한 핵보다는 핵무기를 만들게끔 몰아세운 미국이, 탈레반 테러리스트보다는 대(對)테러 원칙을 고수하는 미국이 더 악한 존재다. 다용도 화수분이랄까, 참으로 편리한 미제다.

노재현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