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열상만 보인 러 전승 기념행사/김석환 모스크바특파원(취재일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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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9일은 러시아인들이 자랑하고 기념하는 제2차대전 전승기념일이다.
나치독일을 패망시키고 유럽과 세계에 평화를 회복시킨 러시아인의 용감성과 끈질긴 저항정신을 기리는 이 기념일은 러시아인들의 국토에 대한 애착과 역사적 업적을 강조하는 뜻깊은 행사다.
그러나 올해로 48주년을 맞은 이번 전승기념일은 과거와 같은 단합되고 화려한 의미있는 날이 되지 못했다.
전통대로 재향군인들의 시가행진과 국가지도자들의 무명용사묘 헌화,자녀들과 함께 전쟁기념관 참배 등의 행사를 벌였고 텔리비전에서는 오래된 기록영화들을 상영했지만,강대했고 단합되었던 과거 러시아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이날의 주인공들인 70,80대 노병사들은 보수·개혁파간 정치투쟁이 이날을 오염시켜 그 의미를 퇴색시켰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개혁파와 보수파는 각각 자신들의 입장에서 이날을 해석하고 기리는,그들만의 러시아 전승일을 기념했다.
전통적 시가행진도 중무장한 폭동 진압부대가 시위대를 겹겹이 둘러싼 가운데 열렸고,시민들도 지난 1일 메이데이 기념시위때의 유혈충돌을 두려워한듯 시위대 합류를 꺼렸다.
이날 모스크바시내는 과거의 전승기념일처럼 국토방위의 소중함과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렸던 무명용사들의 애국심을 칭송하며 이들을 기리는 분위기가 아니라,상대방에게 러시아가 당면한 참담한 현실의 책임을 전가하는 분열된 분위기가 지배했다.
기념행사에 참여하고자 모스크바시내 벨로루시역에 나와있던 70대의 세르게이 추가예프 노인은 월 3천루블(한화 약 3천원)의 연금으로 생활하는 자신의 신세를 조국의 운명과 결부시켜 한탄하면서,47년전 승리는 지금와서 아무런 의미도 없다고 눈물을 흘렸다.
그의 한탄에서 느껴지듯 요즘 러시아의 상황을 보면 제2차대전의 진정한 승리자가 누구냐하는 의문이 일어난다.
가장 큰 고통과 인명손실을 겪으며 나치독일을 패망시켰던 러시아는 오늘날 산산이 찢겼고,전쟁 도발의 책임을 물어 동·서로 나뉘었던 독일은 거꾸로 통일이 되었으며,패전국 일본도 경제대국이자 채권국이 되어 러시아가 차지한 땅을 내놓으라고 큰 소리치고 있는 반면 러시아는 구호를 바라는 손을 내미는 상황이 됐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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