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논문 양적 경쟁이 표절 부추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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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외국에서 연구 중인 한 이공계 박사의 국제적 표절 사건으로 2004년 벽두부터 과학기술계가 시끄럽다. 표절을 포함하는 과학적 기만 행위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고, 동양과 서양의 구별의 문제도 아니며, 정상급 과학자와 평범한 과학자의 구분과도 무관하게 벌어져 왔다.

과학자들의 비윤리적 행위는 크게 '조작'과 '표절'로 양분된다. 약간의 자료 수정, 자료의 선별적 추출, 자료의 날조(존재하지 않는 자료의 창조)는 조작에 해당한다. 관찰값의 부분 부분을 조금씩 잘라내거나 더하는 것이 약간의 자료 수정에 속한다. 예를 들어 한 이론으로부터 어떤 변수의 평균값을 55로 예측했을 경우 이 평균값에서 많이 벗어나 있는 관찰값을 허위적으로 다듬어 평균값에 가까이 있는 값으로 만드는 것이다. 여러 관찰값 가운데 예측값이 합치되거나 합치에 가까운 값만 선택하는 자료의 선별적 추출도 이런 조작에 포함된다.

이 같은 과학적 사기는 자료의 심각한 왜곡이기는 하지만 표절은 아니다. 표절은 다른 사람의 논문으로부터 자료를 무단으로 도용하는 일이다. 연구 윤리의 타락의 정도에서 볼 때 자료의 조작과 표절 간의 우열을 논하기 곤란하지만, 이번에 벌어진 국제적 표절의 경우는 타인의 노력을 절도하고 피해를 준다는 점에서 극심한 도덕적 타락의 양상을 띤다.

현대의 대다수 과학자는 취미가 아니라 생업으로서, 부와 명예를 일구기 위해 과학을 한다고 보아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동서를 막론하고 오늘날 거의 모든 과학자는 '돈'을 뚜렷하게 의식한다. 돈은 일반적으로 국가.기업체.연구지원재단 등에서 나온다. 그런데 이 돈을 가져갈 승자는 '경쟁'을 통해 결정된다. 최근의 유행어인 '선택'과 '집중'은 경쟁의 원천이 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과학자는 자연히 경쟁의 게임에서 살아남기 위해 연구 결과를 내야 한다는 압박을 받게 마련이다. 약간의 수정이나 발표를 위해 가장 좋은 값만을 선택해 얻는 산뜻한 실험 결과가 학술지 게재, 명성의 획득, 연구지원금의 보장, 나아가 권위 있는 상의 수상 등에 기여할 수 있다. 좋은 연구 실적은 분명히 연구비의 계속적인 수혜, 승진과 교수직 종신재직권 확보에 의한 보수 및 특권의 상향 이동에 관건이 된다. 바로 이 같은 과학자의 사회적 조건이 표절과 같은 과학적 사기를 추동하는 계기가 되고 있다.

이번 표절 사건을 계기로 과학 잡지 네이처는 표절 방지를 위한 가이드라인을 내놓기로 했다는 소식이 있다. 물론 이런 노력들은 있어야 하지만, 과학자들을 둘러싸고 있는 현재의 경쟁적 조건을 고려할 때 과학자들의 표절을 억제할 수 있는 절대적인 수단을 찾기란 쉽지 않다.

표절이 단지 한국적 현상인 것만은 아니나, 우리의 특수한 과학연구 환경은 과학적 비윤리를 더욱 부추기는 요소를 지니고 있다. 우리 과학기술계의 과도한 국제 학술지 선호 편향과 더욱이 논문의 양적인 측면, 즉 논문 편수에 대한 획일적 강조가 이번 표절 사건의 중요한 계기가 되었음은 분명하다.

연구자 평가 기준으로서 논문의 수효에 대한 지나친 집착은 연구자들을 압박하는 강력한 요인이다. 정량적 평가와 더불어 정성적 평가, 즉 논문의 질적 우수성을 평가하는 방안이 마련돼야 할 것이다. 대학과 연구소는 창의적 과학연구의 장이 돼야 하며, 읽히지도 않는 연구결과물을 양산하는 논문 공장이 돼서는 안 된다. 비양심적이고 부도덕한 개인 과학자는 물론 지탄받아야 한다. 하지만 그런 과학자를 낳게 한 연구 풍토에도 비판의 시선을 두어야 할 것이며, 그런 풍토의 변경에 대해 숙고해야 할 것이다.

아울러 과학기술 인력의 교육에 각별히 신경써야 한다. 학생들이 과학적 지식뿐만 아니라 과학연구에 필요한 윤리적 덕목을 이해하고 훈련함으로써 과학자로서 '과학의 객관성'을 방어할 수 있는 안목을 기를 수 있을 것이다.

이상원 포항공대 교수.과학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