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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등병, 장군 대하는 것처럼 어려워 '이등별'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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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호 15면

김수정 기자 sujeong@joongang.co.kr
박준오 인턴기자

군 생활 청량제, 은어

군대는 특정 연령대의 남성들이 일정기간 한곳에 모여 제한된 활동을 하는 곳. 은어(隱語)가 생기는 것은 당연하다. 군은 지난 2003년 군 처우 개선 대책으로 ‘부하에게 비인격적 발언을 할 경우 1년 이하 징역에 처한다’고 밝히면서 은어·비어(卑語)의 사용도 금지시켰다. 한 여당 의원은 신세대 장병들이 군에 대한 거부감을 일으키는 원인의 하나가 은어라며 개선책을 촉구하기도 했다. 하지만 군대 은어는 첨단세대 병사들의 감각이 더해져 젊고 유쾌한 언어로 재생산되고 있으며, 인터넷을 통해 일상의 언어로 전파되고 있다. 폭력적 언어가 아닌 한, 군대의 은어는 엄격한 생활의 스트레스를 푸는 청량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중앙SUNDAY가 육·해·공군 병영 현장에서 취합한 은어들도 ‘고전 은어’ 즉 ‘짬밥’(군대의 시간 또는 군 경험), ‘갈구다’(이유 없이 혼내고 괴롭히다)처럼 이미 우리 사회로 튀어나온 말들과 새로운 말들이 버무려진 채 병사들의 애환을 해학으로 승화시키고 있었다.

먼저 제한된 식생활을 둘러싼 은어. 군대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게 라면이다. PX에서 사다 먹는 컵라면이나 봉지라면의 맛은 지상 최고. 봉지 라면에 뜨거운 물을 부어 살짝 익혀 먹는 것을 병사들은 ‘뽀글이’라 부른다. ‘짬식이’ ‘짬돌이’는 군대 급식담당병을 일컫는 말. ‘군대리아’는 군대와 롯데리아의 합성어로 1주에 한 번 급식으로 나오는 햄버거다. 이 햄버거를 '짬버거'로 부르기도 한다. ‘건프로스트’는 건빵을 우유에 넣어 먹는 것으로, 시리얼 상품명인 ‘콘프로스트’에서 유래했다. 식생활은 아니지만 상품의 이름을 차용하는 경우도 많다. 이발훈련병을 ‘비달사순병’, 군에서 나오는 디스 담배를 ‘군디스’라 하는 게 그 예다.

‘짬 타이거’는 잔반을 노리고 부대 식당 주변을 기웃거리는 들고양이다. ‘짬밥’에서 버려진 잔반을 많이 먹어 퉁실퉁실해진 고양이를 호랑이에 빗댔다. ‘짬비둘기’ 역시 식당 주변의 비둘기를 뜻한다. ‘포카락’은 군에서 쓰는 포크숟가락을 줄인 말.
선임·후임 사이 갈등을 표출하는 직급 관련 은어나 줄임말은 아주 많다.

‘대포중’. 군대에서 가장 무서운 장교로 통한다. ‘대령 되기를 포기한 중령’의 준말로 진급에 신경 쓰지 않다 보니 배짱이 두둑해 진다는 뜻이다. ‘장포대’(장군 되기를 포기한 대령)란 말도 있다. 신병들에게 ‘하늘같은’ 병장은 ‘뱀’으로, 소대장은 ‘소댐’, 중대장은 ‘중댐’으로 불린다. 신병을 지칭하는 ‘신삥’은 고전에 속한다. 중대의 행정보급관은 ‘행복한님’, 3주차 훈련병은 아디다스 훈련병(3주차 표시가 아디다스 상표의 줄 세 개 표시와 같다), ‘맞고’는 자신의 기수 바로 위 고참을, ‘맞졸’은 바로 아래 졸병이다. ‘왕고’는 최고 고참이란 뜻이다. '찐빠'는 실수나 잘못을,'꼽창'은 아랫사람을 이유 없이 괴롭히는 상급자를 말한다.

반면 '고문관'은 군대 일에서 좀 떨어지거나 명령에 굼뜬 사람을 지칭하는 말로 상사를 고문한다고 해서 고문관이라고 부른다. 군은 이 단어가 군대 내 ‘왕따문화’를 부추길 우려가 있기 때문에 ‘관심사병’으로 부르도록 독려하고 있다. 함께 입대한 동기는 ‘알동기’. 땀과 눈물, 우정이 어린 은어다.

군생활에서 빠질 수 없는 활동 중의 하나가 실력 무시, 장소 무시의 축구경기다. 계급을 우선한 라인업이 특징. 병사들은 유럽의 축구리그 분데스리가를 차용해 ‘군대스리가’라 부른다.

컴퓨터 게임을 즐긴 세대들이 입대한 이후 정착된 은어도 꽤 있다. 부대의 의무병을 ‘메딕’, 힘든 일을 협동해서 빨리 끝낸다는 말로 ‘SCV’를 쓴다. 모두가 게임 스타크래프트에서 쓰는 용어들이다. 사이버 지식 정보방을 ‘싸방’이라 하는데, 일부 부대에서는 ‘사지방’이라고도 한다. 영어 이니셜을 딴 은어도 생겨났다. 일기장을 뜻하는 일기장 검사는 SG. 일기장의 은어 수양록(S)에 검사(G)를 붙인 말이다. 훈련병 생활은 ‘T-월드’라고 한다. Training(훈련)에서 따왔다.

획일적인 단체복을 묘사한 은어도 상당수다. 형광 주황색인 여름 활동복(체육복)은 ‘오렌지군단’, 상의에 V자 표시가 있는 겨울 활동복은 ‘마징가’로 불린다. 오렌지 군단은 부대에 따라 ‘떡볶이’로 불리기도 한다. 전역을 즈음해 입는 얼룩무늬 위장복은 ‘개구리복’이다.

휴가를 기다리는 간절한 병사들의 소망도 은어에 담겼다. 설탕물 같이 달다는 뜻으로 휴가는 발음도 비슷한 ‘슈가’(Sugar·설탕)라 한다. 입대 후 100일 만에 얻는 휴가는 4박5일인데 '4.5초'다. 너무나 짧은 데 대한 아쉬움이다. 이등병이 된 지 100일이 되는 때는 '돌'이라고 불러준다. 제대가 한참 남았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신병을 지칭하는 '쫄따구'나 ‘말똥’(영관장교), ‘밥풀’(위관장교), ‘딸랑이’(전속부관), ‘짱박히다’(숨어 지내다), ‘개목걸이’(군번줄), ‘싸제’(사회물건), ‘쌀밥’(사회에서의 나이) 등은 클래식에 속한다.

최근 가혹행위 및 구타행위를 근절하려는 군 정책이 실시된 이후 나온 은어들도 있다. 대표적인 게 ‘이등별’. 이등병을 대하는 게 마치 장군을 대하는 것처럼 어렵다는 의미에서다. 다른 부대에 근무하는 병사는 ‘아저씨’로 불린다. 육체적으로 힘든 군대이다 보니 좋은 보직에 대한 부러움과 질투가 뒤섞인 어휘도 많이 생겨났다. GOP(전방관측소) 근무는 ‘지옥피’, 아주 편한 보직을 ‘땡보’로 부른다. ‘삐대다’는 요령을 피우다는 뜻이다. ‘쭉빨다’ 또는 ‘꿀빤다’는 편하게 지낸다는 뜻.

‘군대에 사랑하는 사람들을 빌려준 사람들의 모임’이란 인터넷 카페가 생겨날 정도로 최근 애인을 군대에 보낸 젊은 여성들(남성들도 있다)의 네트워크는 활발하다. ‘곰신’과 ‘군화’는 인터넷상의 일상어처럼 돼 있다. 곰신은 군대에 간 남자친구(군화)를 기다리는 여자친구다. ‘고무신을 거꾸로 신다’에서 유래했다. ‘꽃신’은 군에 간 애인을 2년간 기다린 여자친구를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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