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마을] 한밤의 우산 싸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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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 우리 집은 아주 ‘부자’였다. 부모님과 아홉 명의 아이들, 거기에 딸이 여덟인 ‘딸 부잣집’. 올망졸망한 형제들이 뒤엉켜 집안은 언제나 북새통이었다. 그러니 내 물건을 갖는 것은 생각지도 못했고 막내인 나는 특히 그랬다. 비 오는 날이면 우산 쟁탈전이 벌어졌다. 조금만 동작이 늦으면 볼품없는 우산을 들고 학교에 가야 했다. 초등학교 5학년 어느 날 서울 사는 이모가 물방울 무늬가 새겨진 분홍색 우산을 사왔다. 딱히 누구 거라고 정해준 게 아니어서 먼저 찍는 사람이 임자였다. 눈치를 보아 하니 2, 3년 터울의 언니들도 그 우산에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 꼭 내 것으로 만들 거야. 언니들에게 밀려 항상 뭔가 부족하다는 느낌을 가지고 있던 나는 그 우산만큼은 양보할 수 없었다.

 내일부터 장마래요. 사건이 벌어지기 전날 어른들이 말씀하셨다. 늦은 밤 식구들이 모두 잠든 것을 확인하고 나는 까치발로 현관으로 가 우산을 가져왔다. 언니들에게 뺏길까 걱정돼서였다. 예쁜 우산을 받고 학교에 간다는 설렘에 우산을 품에 꼭 안고 새벽녘에야 잠이 들었다. 분홍색 우산을 받고 가는 나를 친구들이 꽤나 부러워하는 꿈까지 꾸었다.

 그런데 이게 웬 날벼락인가. 일어나 보니 우산은 없어지고 언니들도 모두 학교에 가고 없었다. 혹시나 하고 달려가 본 현관에는 역시나 앙상한 살만 남은 우산밖에 없었다.

 범인은 나와 한방을 쓰는 바로 위 언니였다. 지난밤 내가 살짝 일어나 현관에서 들고 온 우산을 허공에 몇 번 휘두르더니 소중하게 끼고 자는 걸 봐 두었다나! 얌체 같은 언니가 정신없이 자는 내 품에서 우산을 꺼내갔던 것이다. 너무 원통하고 약이 올랐다. 나는 학교 안 갈 거라며 주저앉아 펑펑 울었다. 눈물을 한 양동이는 쏟고 언니와 삼박사일을 싸웠다. 언니, 생각나? 그때 일. 요즘처럼 비 오는 날이면 어릴 적 물방울 우산 생각에 웃음이 배시시 나온다.

 
윤미영(46·주부·전주 진북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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