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화소양(분수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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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기업체의 입사시험이나 공무원 채용시험에는 고사성어들이 자주 출제된다. 한자폐지론자들이나 한글전용론자들에게는 못마땅한 일이겠지만 대부분이 중국에서 건너온 고사성어들은 한문실력을 알아내는데 아주 적합할 뿐더러 그 하나하나에 담겨있는 깊은 의미들이 응시자들의 상식수준을 파악하는데 제격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사성어들은 글 자체의 뜻과 내용이 다른 경우가 많고 함정도 많아 대개 진답 기답이 속출하게 마련이다.
가령 「단사표음」(소박하고 변변치 못한 생활을 뜻함)이라 적어놓고 그뜻을 쓰라고 하면 『단식하고 떠돌면서 물만 마심』이라는 답이 나오는가 하면,「전전반측」(이리저리 뒤척이며 잠을 이루지 못함)이라는 문제에 대해서는 『이리저리 전전하면서 반측만 저지름』이라는 답이 나오기 일쑤다.
우리네 현실사회에서 고사성어들이 자주 등장하는 까닭도 기껏 두자에서 넉자에 이르는 짧은 단어로 의미심장한 내용을 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경우에 따라선 한개의 단어로 백마디 말의 효과를 거두기도 하는 것이다. 하지만 당사자의 처지에 걸맞지 않는 고사성어가 등장하는가 하면,당사자의 의도가 그대로 전달되지 못하기도 한다.
새정부가 들어서 개혁바람이 거세게 몰아치면서 고사성어가 성찬을 이루는 현상을 보이고 있다. 하나의 단어로서 백마디 천마디 말을 대신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많은 탓이다. 정부의 개혁추진을 일컬어 「기호지세」라 표현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자녀의 부정입학으로 여당의 사무총장이 물러났을때는 대통령이 「읍참마속」했다고 수군댔다.
새정부에 참여하지 못한 인사들에게는 「전화위복」이나 「새옹지마」라는 고사성어가 아주 어울린다고들 말한다. 국회의장을 지낸 한 의원이 국회를 떠나면서 「토사구팽」이라는 말을 남겨 한창 회자되더니 의장직을 물러나게된 인사가 다시 「격화소양」이라는 말로 억울함을 나타내 시선을 모으고 있다. 「가죽신을 신고 가려운 발등을 긁는다」는 뜻으로 성에 차지 않음을 암시한다. 물러나는 인사의 발언내용에 관심을 가졌던 국민들은 그 발언자체에 대해 「격화소양」을 느끼지는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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