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vieBlog] 머니게임에 휘둘린 충무로 안정적 제작 환경은 언제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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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저의 무식부터 고백하죠. ‘로미오와 줄리엣’은 알아도 ‘트리스탄과 이졸데’는 잘 몰랐습니다. 바그너의 오페라로도 만들어졌던 유럽의 전설적 연애담을 맛본 것은 이달 초 개봉한 동명의 할리우드 영화를 통해서였습니다. 줄거리를 요약하면, 남녀 주인공이 첫사랑에서 불륜까지 고루 체험하는 사랑의 버라이어티쇼더군요. 적대적인 두 집안의 남녀가 신분을 모른 채 사랑에 빠지는데, 정략적인 이유로 남과 결혼한 뒤에도 서로를 그리워하며 밀회를 이어갑니다.

 뒤늦게 이 영화 얘기를 꺼낸 것은 자로 잰 듯한 시간의 흐름 때문입니다. 가족사-첫사랑-엇갈린 결혼-불륜 등 각 단계가 대충 15분 단위로 어김없이 전환되더군요. 저도 모르게 상영시간을 체크하면서 새삼 깨달았습니다. 영화는 시간예술이라는 것을.

 최근 영화제작사 아이필름의 오기민 대표에게서 재미있는 말을 들었습니다. 할리우드에는 시나리오 한 페이지의 길이를 고스란히 영화의 상영시간으로 계산하는 공식이 있다고 합니다. 심지어 당일 촬영할 대목이 시나리오의 한 페이지가 채 못 되는 분량이라면, 그 길이를 자로 재서 상영시간으로 계산한다는군요. 한마디로 시나리오 서술방식이 그만큼 표준화돼 있다는 얘기죠. 아날로그 시대부터 자리 잡은 전통이라 최근의 영화제작용 컴퓨터 프로그램에도 반영돼 있다고 합니다. 전 세계 영화 ‘산업’의 메카이자, 꿈의 ‘공장’다운 할리우드의 일면이더군요.

  한때 충무로 영화인이 한국영화의 산업화를 화두처럼 얘기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쉽게 말해 돈 얘기였죠. 영화 한 편 만들 때마다 근근이 제작비를 구하고, 그 한 편의 흥행성적에 제작사의 부침이 좌우되는 힘든 경험을 반복하다 보면, 누구라도 안정된 자본과 제작 시스템을 꿈꾸었겠지요. 그런 산업화의 지표 중 하나로 주식시장 상장도 거론된 기억이 납니다. 이는 곧 현실화됐지요. 인수합병(M&A)과 우회상장을 거쳐 여러 제작사가 상장사나 관계회사로 변신했습니다.

 결과는 아시는 대로입니다. 지난해 한국영화의 과잉 제작과 손실 확대의 원인을 논할 때면, 그 배경에 우회상장 붐이 어김없이 거론됩니다. 돌아보면 영화제작사를 비롯한 엔터테인먼트 기업의 우회상장 붐은 영화산업의 내적인 논리 때문만이 아니었습니다. 속칭 ‘테마주’를 찾아나선 주식시장의 수요가 결합된 현상, 즉 일종의 머니게임이었던 거죠. 구경꾼의 입장에서 말하자면, 이 돈의 맛은 달고도 쓰더군요. 당장 거액의 자본이 유입되거나, 이후 주식을 팔아 개별적으로 목돈을 챙긴 것이 단맛이라면, 지금 한국영화계의 위기상황은 거칠게 보아 쓴맛의 대표적인 예겠지요.

 그렇게 단맛과 쓴맛을 고루 맛본 지금도 산업화의 화두는 유효합니다. 다시 말해 제작·유통 시스템의 합리화는 여전히 숙제로 남아 있지요. 앞서 인용한 할리우드 시나리오 얘기를 들은 것도 이 숙제와 관련된 작업을 설명하는 자리였습니다. 머니게임만큼 화끈한 소식은 아니어도, 이런 고민과 노력이 산업화를 이뤄내는 게 아닐까 합니다.

이후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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