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의견이 다른 자는 나의 적…KIN을 아시나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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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디지털 시대-.'

우리는 '디지털'이라는 말을 빼고는 아무 것도 설명할 수 없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인기 드라마인 '다모'나 '대장금'도 인터넷이 없었다면 과연 '폐인 신드롬'이란 말을 만들어 낼 수 있었을지 의문입니다. 한국에서 개인이 인터넷에 쉽게 접근할 수 있게 된지 올해로 10년째를 맞이합니다. 인터넷 중앙일보는 요즘의 화두가 되고있는 디지털 시대의 첨단 문화와 코드를 연재합니다. 최신 유행하는 '디지털 키워드'를 통해 우리 사회의 변화하는 모습을 추적해 보시기 바랍니다. 좋은 아이디어가 있으신 분들의 참여나<제보(digital@joongang.co.kr>)도 기다립니다. -편집자주-

인터넷에서 채팅을 하거나 글을 올렸는데 'KIN'이라는 말을 발견하고서 "킨이 뭐지?"한다면 당신은 '쉰세대'다.

KIN을 시계방향으로 90도 돌려보면 '즐'과 비슷한 글자가 된다. '당신과는 이야기하기 싫다', '관심 없다'에서 더 나아가 '짜증난다'는 욕설에 가까운 뜻이다. 성인들이 '즐팅(즐거운 채팅)'등 가벼운 인사말로 사용했던 것과는 달리 청소년층에서는 원래 뜻과는 1백80도 변질된 것이다.

원래 나쁜 뜻이 아니었던 '즐'에서 나온 'KIN'은 이제 '나와 다른 의견'을 용납하지 않는 배타적인 온라인 문화를 나타내는 키워드가 됐다.

◇KIN의 어원= 1990년대 하이텔, 천리안 등 PC통신에서 글 꼬리에 '즐거운 통신 되세요'라고 붙이던 데서 유래됐다. 줄여서 '즐통'이라고 쓰기도 했으며 온라인 게임이 활성화되면서 '즐겜(즐거운 게임 되세요)'이란 형태로 발전했다.

이 말은 인터넷 게임이 활성화되면서 널리 퍼졌다. 포트리스에서 '즐포', 디아블로 하면서 '즐댜', 리니지에서는 '즐린'하는 식으로 주로 헤어질때 하는 가벼운 인사 정도의 뜻이었다. 이것을 줄여서 '즐 ̄'이라고 쓰던것이 나아가 'KIN'으로 변한 것이다.

◇욕설로 변화= 원래 인사말이던 '즐'이 상대에 대한 경멸을 담은 욕설로 변한 것은 온라인 게임 탓이 크다. 디아블로, 리니지 등에서 트레이드(게임 아이템을 이용자끼리 서로 바꿔 사용하는 것) 할 때 조건이 잘 맞지 않으면 '즐겜'하고 헤어졌다. 그러나 어처구니 없는 조건 등을 만나면 '즐 ̄'하고 떠나는 것이 반복되자 '말도 안되는 소리 하지 마라'는 뜻을 품게 됐다.

더 나아가 일반 게시판에서도 자신의 의견과 다른 글을 보면 '리플'(본문에 붙이는 짧은 댓글)에 '즐 ̄'이라고 쓰기 시작했다. 특히 '초딩은 즐(초등학생 수준과는 대화하기 싫다)', '즐 처드셍('X 먹어라'는 욕설의 변형)'등의 공격적인 모습으로 바뀌면서 일부 사이트에서는 '즐'이란 단어를 필터링해서 삭제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이에따라 '즐'은 'KIN'으로 진화해 요즘도 쓰이고 있다.

◇배타성을 상징= 게임 등에서 주로 쓰던 'KIN'은 요즘은 오히려 정치 관련 글 등에서 많이 보인다. 노무현 대통령 측근 비리를 공박하는 글이 올라오면 "딴잔련 알바는 KIN"이라는 리플이 붙는 식이다. 해석하면 '딴나라당(한나라당), 잔민당(열린우리당에 합류하지 않고 잔류한 민주당) 연합 알바(일당 받고 여론 조작하는 사람)는 물러가라'는 뜻이다. 정치뿐 아니라 오디오, 디지털카메라 동호회 등에서도 자신과 다른 의견에는 여지없이 'KIN'이 붙는다.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은 나의 적'이며 '대화나 타협의 여지는 없다'는 생각을 상징하는 단어인 셈이다.

사이버 공간에서 배타적인 행위가 일어나는 것은 '자신과 동일한 관심사나 생각을 갖고 있는 이들과 심리적인 유대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이같은 일은 현실공간에서도 일어난다. 노사모 회원들 각각은 합리적인 개인이지만 한나라당과 싸움이 벌어지면 집단으로 한 목소리를 내기 마련이다. 온라인 상에서는 이런 경향이 더욱 심하게 나타난다.

청소년 사이버 문화 전문가인 연세대 심리학과 황상민 교수는 "아무리 합리적이고 다양한 생각을 가진 개인들도 특정한 가치를 지향하는 집단에 들어가면 다른 내용을 주장하기가 어렵게 된다"며 "사이버 공간에서는 '동일한 관심사'가 '적과 아군'을 구분하는 수단이 되기 때문에 이같은 배타적 성향이 더욱 심하게 나타나기 마련"이라고 말했다.

◇기성세대의 부끄러운 자화상= 황 교수는 "청소년들에게서 배타적 성향이 강한 이유가 있다"고 말했다. 많은 사회경험을 한 성인들은 비교적 정체성이 뚜렷하다. 그러나 청소년들은 갈수록 현실 공간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해주는 통로가 약해지면서 온라인 활동에 매달린다는 것이다.

황 교수는 "현실 공간과는 달리 사이버 공간에서는 같은 관심을 보이는 사이트를 '자신의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사이트 회원들이 자신을 위해 존재한다고도 본다. '내가 왕'이라고 착각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점점 배타성이 심해진다"고 지적했다.

문제는 뾰족한 해결책이 없다는 데 있다. 다양성을 존중하는 교육과 함께 현실 공간에서 여러 사람들과 각기 다른 생각을 나눈다는 경험과 학습이 필요하다. 그러나 근본적으로는 '지역'이나 '이념'에 따라 갈라진 채 이전투구를 벌이면서 다른 의견을 무시하고 타협을 거부하는 기성세대의 모습이 바뀌기 전에는 청소년층의 배타성을 치유할 수 없다. '아이는 어른의 거울'이라는 말이 있다. 'KIN'이 상징하는 독선과 배타성은 기성세대의 부끄러운 자화상이다.

김창우·김준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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