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최고령 원로 이원순옹 타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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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재계의 산증인으로 전국 경제인연합회의 창설을 주도한 전경련고문 해사 이원순옹이 19일 오전 5시20분 강남성모병원에서 숙환으로 별세했다. 1백4세.
이옹은 보성전문학교를 마치고 일제하 대한독립단회장과 미국 망명정부에서 이승만 전대통령의 비서실장을 맡아 독립운동을 펼쳤으며 해방이후에는 한미협회를 창설하고 국제올림픽 위원회에 한국대표로 참석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펼쳐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았다. 그는 한국증권과 한국관광개발을 세워 기업가로 재계의 기초를 닦았으며 60년대초 전경련 창설때 첫 모임을 자신의 빌딩에서 열었다.
유족은 세딸이 있으며 장지는 국립묘지 국가유공자 묘역(예정).
◎향년 104세… 전경련창설 주도
이옹은 평소 정주영현대그룹 명예회장이나 구자경럭키금성회장 등 재계의 핵심인사들에게 『자네들 그동안 키가 많이 자랐구먼…』이라고 하대할수 있는 유일한 원로였다.
1890년에 태어난 이옹은 재계인사 가운데 가장 장수를 누렸으며 월남 이상재선생과 장기를 함께 둔 시대의 인물이었다.
그래서 『세기를 넘어서』라는 저서도 살아있는 역사로 그가 겪은 오랜 세월의 경험을 담았다.
독립운동과 체육·외교활동,기업을 두루 거친 이옹이 말년에 가장 애착을 보인 분야는 재계. 그는 『최고의 엘리트들이 모인 전경련이 우리나라를 올바로 이끌지 못하면 나라가 망한다』며 전경련의 책임의식을 자주 강조했다.
전경련과 첫 인연을 맺은 이후 그는 91년까지 전경련의 창립기념식에 빠짐없이 참석했고 일본 경단련인사들도 그에게는 깎듯이 예의를 갖추었다. 그는 『창립기념식에 기어서라도 나가겠다』고 고집을 피웠으나 작년에는 노환으로 입원하는 바람에 참석하지 못해 전경련에서 과일바구니를 보내 대신 이옹의 장수를 빌었다. 스스로의 장수비결을 소식으로 꼽았던 이옹은 중풍으로 휠체어를 타고 다니던 김용완경방명예회장에게 『젊은 사람이 웬 까치걸음이냐』고 할만큼 유머감각이 뛰어났으며 평소 자택 거실에서도 검은색 싱글 정장 차림으로 꼿꼿이 앉아있어 「살아있는 정물화」로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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