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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영 가족 소설 - 즐거운 나의 집 [3부] 가을 (104)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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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그림=김태헌

"아니 미안하다. 꼭 나쁜 결정이라고 생각했던 것만은 아니야. 하지만 네 생각도 아주 틀린 것은 아니었다고 느껴졌어. 언제나 자기가 당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상처는 오래도록 선명한 것이니까. 엄마는 거기에 동참해주고 싶었어. 결과가 나쁘면 그것을 함께 겪어주고 싶었던 거야.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던 게 아니라… 그냥 그러고 싶었던 거야.”
 
엄마의 말을 듣자, 가슴 한 켠이 싸아 했다.

“엄마 나는 가족이 뭔지 모르겠어. 부모가 무엇이고 자식이 무엇인지 모르겠어. 사람들 모두 가족이 소중하다, 소중하다, 하는 데 그게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어. 어떤 때는 낯선 사람이 훨씬 더 내게 사랑스럽고, 날 더 이해하는 게 느껴져.”
 
엄마는 한숨을 잠깐 쉬더니 턱에 손을 고였다.

“말이야, 너희 키우면서 엄마도 그런 생각했어. 대체 나는 남들이 말하는 지극히 정상적인 가정에서, 심지어 남들이 보기에 행복한 가정에서 자랐는데 나는 뭘 했었나? 외할머니는 그때 엄마에게 어떻게 했었나, 외할아버지는? 그런데 말이야. 생각나는 게 없는 거야. 그냥 가족들이 맛있는 거 먹으러 갔을 때 좋았던 거, 외할머니가 잔소리할 때 신경질 났던 거, 혼나고 울었던 거, 내 방 가지고 독립하고 싶다고 생각했던 거, 외할아버지가 여자라고 밤 9시까지 들어오라고 할 때, 빨리 어른이 되어서 집을 떠나고 싶다고 생각한 거….”
 
“정말?”
 
내가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나도 다시 생각해보고 신기했다니까. 이렇게 생각나는 게 없을 수가… 싶었어. 그래서 솔직히 너희에게 어떻게 해주어야 이게 좋은 가정인지 모르겠는 거야. 그런데, 이런 생각도 들더라. 혹시, 아무 생각도 없는 거, 그게 좋은 가정이라는 게 아닐까, 그냥 밥 먹고, 자고, 가끔 외식하고 가끔 같이 TV 보고, 가끔 싸우고, 더러 지긋지긋해 하다가 또 화해하고, 그런 거…. 누가 그러더라구, 집은 산악인으로 말하자면 베이스 캠프라고 말이야. 튼튼하게 잘 있어야 하지만, 그게 목적일 수도 없고, 또 그렇다고 그게 흔들거리면 산 정상에 올라갈 수도 없고, 날씨가 나쁘면 도로 내려와서 잠시 피해 있다가 다시 떠나는 곳, 그게 집이라고. 하지만 목적 그 자체는 아니라고, 그러나 그 목적을 위해서 결코 튼튼하지 않으면 안 되는 곳이라고. 삶은 충분히 비바람 치니까, 그럴 때 돌아와 쉴 만큼은 튼튼해야 한다고….”
 
그렇게 쉬운 곳이 집이라면 하기는 나는 이미 그런 집을 가진 것 같긴 했다. 이제는 아빠가 날 미워하는 것처럼 느낄 때, 천지에 혼자 있는 것 같은 느낌은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게 다일까? 엄마 그런 거라면 혼자 살아도 되잖아. 쉴 수 있으니까. 맘에 맞는 친구랑 살아도 되잖아. 서로 사랑하니까. 그러면 가족이란 대체 뭐냐구?”
 
엄마는 내 머리를 콩, 하고 쥐어박았다.

“시끄럽다. 그만해. 그걸 알면 엄마도 너도 세계적인 석학이 되는 거야. 그러니까 우선은 우리 이렇게 하는 게 어떨까? 동생들 일찍 재워놓고 요 앞에 생맥주 마시러 나가자. 엄마가 특별히 쏠게.”
 
엄마는 장난꾸러기처럼 눈을 반짝거리며 말했다.

그리고 그날 밤 일찍 잠들지 않는 동생들을 거의 윽박지르다시피 잠자리에 들게 하고 우리는 아파트 상가에 있는 생맥주 집으로 갔다. 다니엘 아저씨도 나왔다. 우리는 거기서 가족의 의미하고는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만 하며 즐겁게 생맥주를 마셨다. 나는 두 사람이 여행지에서 어떤 시간을 보냈는지 묻지는 않았다. 나는 그런 말을 들어도 될 만큼 성숙했지만 어른들이 거북해 할 거 같아서였다. 돌아오는 길에 벌써 바람은 아주 차가웠다. 엄마의 팔짱을 끼고 걸어오면서 나는 문득 가족이란 밤 늦게 잠깐 집 앞으로 생맥주를 마시러 나갈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는 팔짱을 끼는 사람들, 그리고 편안히 각자의 방에서 잠이 드는 그런…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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