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보기 부끄러운 어른들/정규웅(중앙칼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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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한창 자라나는 열살 안팎의 어린이들에게는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신기하고 이상하게만 받아들여지게 마련이다. 신기한 것은 인간이 이룩해낸 과학문명의 위력이요,이상한 것은 그 과학문명을 만들어낸 인간 그 자체다. 무궁무진한 지혜를 가지고 지구를 하루가 다르게 변모시켜가고 있는 인간들이 막상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서는 어째서 요령부득의 행태만 저지르고 있는 것인지 어린이들에게는 도무지 이상하기만 한 것이다.
○“부자는 사기꾼인가요”
어린이들에게는 어른들의 세계에 대해 「왜?」라는 의문이 항상 꼬리를 잇는다. 별것 아닌 일로 이웃간에 싸움을 벌이는 어른들이 이상하고,나라간에 싸움을 벌이는 어른들의 세계는 더더욱 이해하지 못한다. 몸에 나쁘다는 술·담배에 미친듯 탐닉하는 어른들의 모습은 「어른들은 바보」라는 생각을 갖게 하고,권력과 재산을 가질만큼 가졌는데도 더욱 크게 많이 갖고자하는 어른들이 우스꽝스럽게 보이기도 한다.
「술마시는게 창피해 그걸 잊으려고 술을 마시는」 술주정뱅이를 괴상하고 야릇하게 바라보는 것은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뿐만이 아니다. 별을 세고 또 세어 임자없는 별들을 자기것으로 만들려 하는 상인을 어리석다고 보는 것은 소설속의 어린이들 뿐만이 아닌 것이다. 『어린 왕자』보다 더 실감나는 글이 있다. 70년대에 독일에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던 『아빠,찰리가 그러는데요…』란 책이 있다. 원래는 방송 교재로 쓰였던 것인데 사회의 이런저런 궁금한 일들을 아들이 묻고 아버지가 대답하는 대화체로 이루어져 있다.
아들이 『어떻게해서 부자가 되는 거냐』고 물으면 아버지는 『열심히 일하고 절약하면 부자가 된다』고 대답한다. 아들은 다시 묻는다.
『찰리가 그러는데요. 걔네 아빠가 그러셨는데요. 다른 사람의 몫을 가로채거나,남을 속이지 않으면 부자가 될 수 없대요. 그럼 부자들은 다 사기꾼인가요?』
어른들에 의해 씌어진 글들이기는 하지만 어느 시대 어느 사회나 어린이들이 품고 있음직한 의문들이다. 국민학교 교사로 재직중인 분들을 만나보면 최근 한동안 나라 전체를 휘몰아친 공직자와 정치인들의 재산공개 파동에 대해서 간혹 어린이들로부터 이런저런 질문을 받게되면 도무지 할말을 찾지 못해 쩔쩔맨다고 한탄한다.
○8살 손자에 5억집
몇몇 어린이들의 관심은 공개된 재산목록 속에 어린이들에게 상속된 부분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에 쏠리기도 한다는 것이다. 여덟살짜리 손자에게 5억원이 넘는 집을 넘겨준 사람이나,좀 오래전의 일이기는 하지만 열살을 갖넘긴 자녀들의 이름으로 노른자위 땅들을 매입한 사람들의 행위가 같은 또래 어린이에게 어떻게 비쳐졌을는지 자못 궁금하다. 선생님에게 이런 식의 질문을 퍼부은 국민학교 어린이들도 있었을는지도 모른다.
『우리 아빠는 무지무지하게 부자인데요. 다른 부자들은 어린 자식들에게 집도 사주고 땅도 사주는데 왜 우리 아빠는 저한테 아무 것도 사주지 않는가요? 혹시 우리 아빠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아닐까요?』
물론 당사자들에게는 변명의 여지가 있을 수 있다. 「아들의 장래를 걱정해서」라든가,「내야할 상속세를 다 물었는데 내돈 가지고 내 자식 땅 사준 것이 무슨 큰 잘못이냐」고 항변한다면 그것으로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문제는 열살 안팎의 어린이들을 축재의 수단으로 동원했다는데 있다.
돈많은 집 자식으로 태어나서 일평생 돈 걱정 않고 살아갈 수 있게 운명지워진 사람에게도 문제가 있을 수 있는데 하물며 나이 열살 안팎에 이미 수억원대의 재산가가 된 어린이들이 과연 세상을 어떻게 보고,무엇을 생각하며 살아갈 것인가를 따져보면 그것이 반드시 자식을 위한 올바른 처사일 수 없음은 너무나 당연하다.
○노력없는 부는 고통
일반적으로 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시작한 샐러리맨이 결혼해 내집을 장만하기까지는 최소한 15년이라는 긴 세월이 필요하다는 통계가 나와있다.
적지않은 노력과 희생이 필요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목표지점에 도달하는 것을 꿈의 실현으로 생각하고 있으며,그것을 보람이며 살아가는 즐거움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열살 안팎의 자식들에게 이미 거액을 상속한 어버이들은 자식들에게 삶의 보람과 즐거움을 일찍부터 빼앗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아마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을는지도 모른다.
『이 애비가 언젠가는 부정축재자로 몰려 너희들이 성장한후 제대로 살아갈 수 없을는지도 모를 터인즉 너희에게 일찍부터 큰 재산을 물려주는 것은 이 애비의 선견지명이니라.』<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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