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팽」에 앞서야 할 것(유승삼칼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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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정계를 떠남에 있어서 토사구팽(토끼사냥이 끝나면 사냥개를 삶아먹는다)의 감회가 없지않다.』 재산공개에 따른 물의로 의원직 사퇴 및 정계은퇴 의사를 밝힌 전국회의장 김재순의원은 사퇴성명에서 이렇게 원망의 감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토사구팽­. 단 네자의 성어일뿐이지만 그 함축은 깊다. 여기에는 우선 오랫동안 친분을 나눠왔던 김영삼대통령에 대한 개인적인 섭섭함,정치의 비정에 대한 새삼스런 깨달음이 서려있다. 그러나 이 표현의 더 깊은 함축은 그것이 최근의 개혁드라이브에 대한 구세력의 불만을 압축적으로 대변하고 있다는데 있을 것이다.
○구세력 개혁불만 대변
대부분의 민정계는 내켜서라기 보다는 대세에 밀려 김영삼대통령을 대통령 후보로 추대했었고,또 오늘에까지 이른 것이지만 결과가 이렇게까지 되리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민정계로선 숫자로 보나 후보선출 및 대선과정에서의 자신들의 「충성」과 「기여」로 보나 최소한 자신들의 기득권이 보호될 수 있으리라 기대했을 것이다. 그러나 결과는 보는 바와같으니 「토사구팽」이란 절규가 나올 수 밖에는 없게 되었다.
「청산」의 대상이 된 정치인들로서는 땅을 칠 일이겠으나 문제는 국민여론이 김 대통령의 편에 서있으니 누구도 어쩔 도리가 없을 것이다. 정말 현재의 김 대통령은 문자 그대로 기호지세다. 여론은 김 대통령에 대한 압도적 지지속에 지난날의 비리에 대해 더 철저한 조사와 그에 따른 문책을 요구하고 있다.
상황이 이렇게 전개된 것은 거의 전적으로 김 대통령의 이니셔티브에 의한 것이었다. 40년의 정치생활을 거의 여론에 의존해 꾸려온 김 대통령은 여론의 힘을 누구보다 잘 알고있다. 그의 여론에 대한 후각은 측근들로부터도 감탄을 사고있다. 측근들이 개혁분위기의 조성을 위해 옆에서 무언가를 조언할 틈도 없이 그 스스로 앞장서 기사거리를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재산공개뿐 아니라 대사면 등등 이제까지 취한 일련의 개혁조치들에 있어서도 적극적이고 진취적인 입장을 취했던 것은 대부분 대통령이었다는 것이다. 한 여권인사는 김 대통령을 언론플레이의 「달인」이라고 평했다.
○후속조치 잘해야 공감
이번 재산공개 파문에 있어서도 측근에서는 예상외의 파문에 놀라 『문제가 많다는데 공감하지만 실사를 무한정 확대할 수는 없다』『보궐선거가 많아서 좋을건 없다』고 수습에 중점을 두고있을때 김 대통령은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여전히 『썩은 것은 도려내야 한다』고 말했다. 또 다른 한사람의 측근이 『언제까지 박수받는 정치만 할 수 없는게 아니냐』 『언론에서 쓰는대로 다 따라 다닐 수는 없는 것』이라고 말한 같은날 『현재 겪고있는 상황은 민자당이 스스로의 자정노력을 통해 국민의 정당으로 우뚝 서느냐,외면당하느냐의 갈림길에 서있는 것』이라고 태연히 말하고 있었다.
이래서 김 대통령에 대한 국민의 인기는 대선때보다 거의 갑절로 치솟았지만 이제 김 대통령은 그 인기로 해서 큰 부담을 안는 상황에 놓이게 됐다. 그의 인기만큼 국민의 분노도 치솟았고 기대도 부풀었다. 그런만큼 그런 기대를 충족시켜주지 못한다면 국민들의 생각은 전혀 달라질 수도 있는 것이다. 김 대통령도 이젠 이쯤에서 재산공개 파문을 일단 마무리지을 생각인 모양이지만 그렇다면 의문이 제기된다. 책임추궁의 선을 과연 어떤 원칙과 기준에서 그은 것인가. 이번에 드러난 비리의 재발을 막기위해 구체적으로 어떤 구상을 갖고있는가. 이에 대한 답변이 명확하고 납득할만한 것이 되지 않는한 국민의 박수와 기대는 실망과 의문으로 변할지 모른다. 재산공개는 결국 세장악을 위한 것이나 인기주의에 그치는 것이 아닌가. 사실 3당합당 이후 대통령 당선까지 일련의 과정을 지켜보면서 김 대통령의 드라이브가 이 사회의 개혁을 위한 것인지,그의 성취욕구의 충족을 위한 것인지 알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적지않았다.
○개혁청사진 제시해야
이는 근본적으로 김 대통령이 구체적이고 정연한 개혁의 청사진과 그 스케줄을 사전에 제시해주지 못했던데서 기인한다. 당선전까지는 그렇다 하더라도 최소한 당선후에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어떤 기준과 원칙 아래 어디까지 하겠다는 것을 표명해주었어야 했다.
「인사는 만사」라면서도 인사에서 시련을 겪은 것은 그 때문이다. 고위직 가운데도 재야쪽·진보쪽 인사가 있는가 하면 개혁이미지에 도무지 걸맞지 않은 인물이 적지않다. 도대체 어떤 생각으로 한 인사인지 짐작하기 어렵다.
파괴는 필요하고 속시원한 것이지만 더 중요한 것은 파괴뒤의 건설이다. 또 「파괴」도 보편적인 원칙이 먼저 제시되고 그에따라 집행되지 않으면 보복이나 세력개편의 인상을 줄 우려가 있다. 이는 현재 김 대통령의 개혁드라이브를 지지하고 있고 그의 힘의 원천인 다수국민의 기대와는 맞지않는 일이다.
김 대통령은 이제부터 무엇을 어떻게 「건설」할지를 분명히 제시하고 그 법적근거의 마련과 제도화에 주력해야 한다. 그러면 국민은 아무리 많은 「구팽」을 해도 거리낌 없이 김 대통령을 지지할 것이다.<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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