옐친대통령의 승부수(사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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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러시아는 어디로 가는 것인가. 현재로선 한치앞을 내다보기 힘들 정도로 혼란과 불안정 상태에 있다. 옐친대통령이 비상통치를 선언하자 이에 반대하는 의회는 옐친에 대한 탄핵절차를 밟기로 했다. 헌법재판소는 비상통치 선언의 위헌여부를 심사키로 했고 군은 불안정한 상태에서 사태추이를 주시하고 있다. 모스크바를 비롯한 주요 도시에선 군중들이 찬반시위를 벌이고 있다.
이같은 혼란의 근원은 강력한 중심권력의 부재,옐친개혁의 부진,그로 인한 경제상태의 악화다. 고르바초프 퇴진 이후 러시아에 강력한 중도세력이 없어진 것도 사태악화를 더욱 가속시킨 원인의 하나다. 소연방 해체 이후 러시아에서는 급진개혁파인 옐친의 주도하에 내정개혁,시장경제로의 전환,친서방 개방외교를 펴왔다. 그러나 의회를 중심으로 하는 보수세력이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내정개혁과 경제체제 전환을 방해하는데다 서방세계의 실질적인 지원이 부족해 경제상태는 악화돼왔다.
옐친은 보수파의 개혁반대를 봉쇄키 위해 의회에 편중된 국가정책 결정권을 대통령에게 집중시키는 이른바 권한분점에 대한 국민투표안을 의회에 제안했으나 지난 10일 모두 부결됐다. 이에 옐친은 권한분점안을 오는 4월25일 인민투표로 결정하고,그때까지 비상통치권을 행사키로 한 것이다. 의회를 배제시킨 이 긴급조치는 정면승부를 선택한 옐친의 정치대도박이기도 하다.
대통령 중심의 개혁파와 의회 중심의 보수파 대결에서 승패를 좌우하는 요인은 국민과 군대다. 군은 현재 중립을 지키고 있으나 정부통제가 지극히 불안정해 언제 어떤 사태가 일어날지 모른다. 인민들은 물자부족과 물가고·실업 등 만성화된 경제난이 개선되기를 기다리면서 그 어느 세력에도 결정적인 지지를 보내지 않은채 불만에 차있다.
옐친이 이긴다면 「10월 유신」을 단행한 박정희 전대통령처럼 개발독재형 권력자가 되어 급진개혁을 계속해 나갈 것이다. 의회가 승리하면 개혁은 좌초하여 정국불안과 경제난이 끊이지 않을 것이다. 국민이 일치된 행동을 취하기 어려운 상태에선 최대의 변수는 역시 군대일 수 밖에 없다. 따라서 군이 어느 편에 서느냐에 따라 러시아의 향방이 좌우될 것 같다. 지금처럼 중립을 지키거나 옐친을 지지하면 안정과 개혁이 가능하다. 그러나 의회를 지지하거나 양파로 분열되거나,또는 독자적인 행동을 취한다면 내전과 냉전체제의 부활 등 큰 혼란이 초래될지 모른다. 현재로는 군이 중립을 지키고 옐친이 서방의 지지를 받고있어 우선은 유리한 형세다.
언제 어디서나 개혁에는 강력한 권력집중이 요구된다. 러시아는 지금 개혁이 시급히 요구됨에도 권력중심은 분산돼 있다. 러시아의 발전과 세계평화에의 기여는 개혁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서방세계가 옐친을 지지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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