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 '헌법 인식' 크게 달라졌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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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2004년 5월 직장인 사이엔 "관습 헌법에 따라 택시비는 앞자리에 앉은 사람이 낸다"는 농담이 등장했다.

헌법재판소가 '신행정수도 이전을 위한 특별법'에 대해 위헌결정을 내리면서 근거로 제시한 '관습 헌법'이란 말을 인용한 것이다. 당시 헌재는 대한민국의 수도가 서울이라는 사실은 헌법 조항에 적시된 것과 다름없다고 판단했다. 수도를 옮기려면 헌법 개정 수준의 절차가 필요하다는 것을 위헌 결정의 근거로 내세웠다. 회사원 이상민(37)씨는 "서울에 대한 내 생각을 법률적으로 잘 표현했다"며 "헌법에 대해 생각을 정리하는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1948년 제정된 대한민국 헌법이 17일 59돌을 맞았다. 상당수 국민은 올 제헌절을 어느 해보다 의미있게 지켜보고 있다. 참여정부 들어 줄기차게 이어져 온 헌법 논쟁 때문에 헌법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것이다.

◆생활 속으로 돌아온 헌법="모든 세대는 자기 세대에 맞는 헌법을 가질 권리가 있다." 미국의 3대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의 말이다. 헌법이 그 시대의 생활규범이고 그것을 국민이 받아들일 때 진정한 헌법으로서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명지대 허영 교수는 "국민의 공감적 가치가 많이 담겨 있을수록 좋은 헌법"이라고 말했다.

현 정부 들어 헌법을 어긴 정책이 나오고, 헌법이 잘못됐다는 노무현 대통령의 발언이 계속되면서 생긴 아이러니다. 그만큼 헌법재판소의 인터넷 홈페이지를 찾는 방문자 수가 급증했다. 98년 9월 개설 뒤 2002년까지 4년 여간 접속 건수는 116만여 건이었다. 연평균 29만여 건이다. 그러나 2003년 이후 접속 건수가 폭증했다.

행정수도 이전에 대해 위헌 결정이 내려진 2004년 상반기엔 접속 건수가 63만8000여 건에 달했다. 대통령 탄핵 심판이 있었던 2004년 하반기엔 53만여 명이 홈페이지를 찾았다. 헌법소원과 위헌심판 등 이름도 어려웠던 헌법재판 사건에 국민이 점차 익숙해진 것이다. 본지와 동아시아연구원이 지난달 조사한 한국 사회 주요 기관의 영향력.신뢰도 평가에서 헌법재판소는 국가기관 중 3년 연속 1위를 고수하고 있다.

◆훼손하려 할수록 관심 높아져=허영 교수는 "참여정부 들어 헌법에 관심이 높아진 것이라기보다 정부에 의해 헌법이 무시.폄훼당하자 그 반작용으로 규범력을 지키고자 하는 국민의 의지가 자연스레 생긴 것"이라고 진단했다. "과거 권위주의 헌법이 '집권세력을 위한 규범'이었던 것과 달리 87년 개정(9차 개헌)된 지금의 헌법은 '국민을 위한 헌법'이라는 국민적 공감대가 있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시민과 함께하는 변호사들'의 이석연 대표 변호사는 "요즘처럼 헌법이 수난당하고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법치주의가 흔들린 적이 없다"고 말했다. 행정수도 이전에 대한 위헌결정뿐만 아니라 사학법과 신문법 개정, 기자실 통폐합 추진 등 헌법적 권리를 제한하는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는 것이다. 연세대 김종철 교수는 "대통령의 헌법소원을 계기로 국민이 선관위의 역할에 대해 알게 됐다"고 말했다.

◆'그놈의 헌법'이기 이전에 국민의 헌법=노 대통령은 지난달 2일 "그놈의 헌법"이라는 말을 했다가 여론의 집중포화를 맞았다. 서강대 임지봉 교수는 "노 대통령이 헌법적인 이슈를 많이 제기한 것이 헌법의 장점을 부각시킨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임 교수는 그러나 "헌법은 권력을 통제하고 견제하기 위해 있는 것인데 권력자가 스스로 보호받으려 하고, 정치적 목적에 이용하려 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밝혔다. 헌법적 논의를 공론화하는 것은 바람직하지만 국민이 주도하고 원하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는 것이다. 허영 교수는 "헌법은 국민이 이를 지키고자 하는 의지가 사라졌을 때, 국민의 마음에 의해 변화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김승현.박성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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