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스모폴리탄이 별건가요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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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호 25면

교보문고에 간다는 후배에게 아오이 유우의 사진집을 부탁했다. 서른 줄 남자가 일본 미소녀 사진집이라니. 숨어있던 오타쿠를 발견한 표정으로 회사를 나섰던 후배는 비닐에 싸인 아오이 유우의 사진집을 조심스레 꺼냈다. “아오이 유우는 2만3180원이네요.” 사진집을 산 이유는 다른 데 있다고 변명하려다 관뒀다. 사실 끈나시 입고 사막에 선 소녀의 자태보다도 더 끌렸던 건 사진집에 사용된 필름이다. ‘코닥 포트라(Portra) 160NC’. 여전히 필름으로 사진을 찍는 사람이나, 뒤늦게 아날로그 필름 사진의 매력에 빠져든 사람에게, 코닥에서 생산되는 이 필름은 공들여 세탁된 디젤 청바지 같은 물건이다. 금세 찍은 사진을 홀연히 빈티지한 이미지로 바꾸어내는 덕이기도 하고, 또 한 롤에 6000원이나 하는 값나가는 필름인 때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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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원짜리 필름을 도매로 쓰는 주제에 6000원짜리 필름을 살 용단을 부리는 건 사치다. 사치라는 건 마음의 허영이라 가끔은 모른 척 채워줘야 살맛이 나긴 한다. 다만 사야만 한다고 세상의 모든 걸 다 살 수 있는 건 아니다. 국내의 모든 인터넷 사이트를 밤새도록 뒤져도 ‘포트라 160NC’는 없었다. 심지어 필름 이름을 잘못 기재한 사이트가 있을까 싶어 ‘Potra’와 ‘Fortra’를 써넣어도 검색되는 건 없었다. 인터넷 사진 동호회 사람들과 네이버 지식 구걸꾼들이 “포트라 160NC는 어디서 구할 수 있느냐”며 부르짖고 있는 것으로 보아하니 단종된 것이 틀림없다. DSLR의 시대에 필름이란 모름지기 백악기 말기의 공룡 같은 존재다.

해답은 인터넷 경매 사이트인 이베이밖에 없었다. 침을 꿀꺽 삼켜대며 이베이 검색을 시작했더니 미합중국 ‘세달리아’라는 촌구석에서 상상력 없는 이름을 갖고 살아가는 보통남자 ‘존’이 ‘포트라 160NC’를 한 광주리 경매에 올려놓고 있었다. 한 롤당 2500원. 반값에서 500원이 싸다. 거기다 50롤의 배송료는 20달러. 페라가모 구두를 랜드로바 가격에 사는 거다. 유럽과 일본에서 밤을 새우고 경매를 지켜보던 대여섯 명의 입찰자와 피 말리는 경쟁을 시작했다. 이베이 경매의 진수는 마지막 30초다. 미리 비싼 돈을 걸고 있어 봐야 소용없다. 마지막 30초 동안 경쟁자들은 저마다 ‘예상 입찰가’를 두들기며 손톱을 물어뜯는다. 다행히 세달리아에 사는 미스터 존의 필름을 모조리 낙찰받은 나는 흥분에 휩싸인 채 e-메일을 보냈다. “안녕 존. 나는 너의 필름을 대량으로 낙찰받은 한국의 입찰자다. 너의 필름을 얼마나 신속하게 보내줄 수 있는지 친절하게 알려줄 수 있는 호의를 베풀렴”.

금세 답장이 왔다. “감사하다. 마을의 사랑스러운 체신부 직원 로즈 양이 튼실하게 필름을 싼 뒤 남한으로 보낼 것이다. 도달하기까지는 대략 2주일이 소요될 것을 예상하는 바이다. 당신의 지속적인 인내심을 유지하는 것이 꽤 요구된다. 나는 이제 남부로 휴가를 갈 것이고, 최근 구매한 핫-텁에서 차가운 것들을 섭취할 것이다. 당신도 받은 필름으로 기쁜 여름을 찬양하라. 당신의 신실한, 존.”
나의 신실한 존은 극동의 누군가가 지불한 몇 십 달러의 돈을 오랜만의 휴가에 신실하게 사용하리라. 나는 코스모폴리탄 쇼핑객이 된 듯한 호사를 마포구 상수동 언저리에서 잠시나마 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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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훈씨는 글을 쓰고 여행을 하고 사진을 찍는, 그리고 그 모든 일을 하기 위해선 쇼핑이 꼭 필요하다고 믿는 ‘씨네21’ 기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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