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림길에 놓인 옐친 정치생명/혼란 가속되는 러 정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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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비상조치”는 엄포용/의회와의 타협 실패땐 설 땅 막막
최근 러시아정국의 혼란상이 점점 격화되고 있는 가운데 모스크바의 정치분석가들은 보리스 옐친대통령의 국정장악력에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다.
옐친대통령 스스로 현 시국을 『의회의 반발 때문에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듯이 만약 이와 같은 상황이 계속된다면 옐친은 자신이 지시하는 명령이 실제의 행정계통에서 전혀 집행되지 않는 「명목상의 지도자」로밖에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모스크바의 정치분석가들이 가장 우려하는 사태는 의회와 대통령간의 대립이 장기화되고 국정 공백과 경제파탄 현상이 계속될 경우 나타날 수 있는 돌발적 사태,즉 쿠데타를 통한 극단적 세력의 집권과 이에 대한 국민의 반발 등이 반복되는 혼란이다.
미하일 폴토라닌 연방정보센터 이사장 등 옐친 측근들은 보수파 쿠데타 가능성을 강조하고 있고 반대로 보수파들은 옐친대통령 친위세력의 쿠데타 가능성을 우려하고 있다.
현재까지의 상황으로는 이와 같은 극단적 혼란상이 발생할 가능성은 그렇게 높지 않다고 할 수 있다.
옐친대통령이 2일과 3일 연속적으로 극약처방이라 할 수 있는 비상조치 가능성을 주장하고 있지만 러시아 정계의 분위기는 헌정질서는 지켜져야 한다는 공감을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현재와 같은 분위기에서는 보수파는 물론이고 옐친대통령도 비상조치나 쿠데타를 시도할 경우 이를 통해 국민과 군·경찰·보안부(구KGB) 등의 지지를 이끌어낼 수 없다는 것을 모두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의 위기정국이 타협으로 수그러들 수 있을지 여부는 조만간 소집될 예정인 인민대표대회 임시회의에서 판가름나겠지만 추측가능한 전망은 다음과 같은 세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는 임시 인민대표대회에서 대통령과 의회간의 권력분립 원칙을 상호 납득가능한 수준까지 협상·토론을 통해 이끌어내는 방법이다.
이럴 경우 의회는 의회의 결의로 신헌법 개정안을 통과시켜 내달 11일로 예정된 국민투표 자체를 폐지시키고 헌정위기를 타개하는 가능성이다.
그러나 현재까지 양측에서 마련해놓은 권력분립안은 물과 기름같이 도저히 타협을 이룩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어서 어느 한편의 일방적 양보없이는 이 안의 실현가능성은 희박한 편이다.
둘째는 의회와 대통령이 타협에 실패하고 의회에서 일방적으로 내달 국민투표 실시계획을 백지화함과 동시에 대통령과 의회 선거를 내년에 조기실시하기로 결정하는 것이다.
이 경우 옐친측에서 강력한 반발을 보일 것이 틀림없지만 법률을 위반하지 않으면서 대통령이 이를 번복시킬 수 있는 힘이 없다는 난점이 있어 정국이 극단적 파국으로 변할 가능성이 높다.
셋째는 대통령과 의회가 합의에 실패하고 국민투표를 예정대로 실시하는 경우다.
이 경우 국민투표에서 투표참여율이 50%를 밑돌거나 유권자 총수 50% 미만의 찬성을 얻을 가능성이 아주 높다.
그렇게 되면 의회나 대통령 모두 불신임을 받는 결과가 빚어져 결과적으로 현권력기구가 모두 물러나고 새로운 국민의회(제헌의회)같은 기구가 결성되어야 한다.
현재 옐친대통령 측근중 강경파 일부와 가브릴 포포프 전 모스크바시장 등이 이끄는 민주러시아에서는 국민투표를 실시해 대통령이 신임을 얻으면 좋고,만약 안되면 민주러시아 등을 기반으로한 제헌의회를 구성해 정국위기를 타개하자는 안을 적극적으로 밀고 있다.
그러나 이를 관철시키는 과정이 너무 복잡하고 위험하다는 반론도 많아 아직까지는 과격파 민주세력들의 주장에 머무르고 있는 상황이다.
위에 언급된 세가지 가능성중 가장 현명한 방법인 첫번째안이 채택되어야 한다는 당위성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이의를 달지 않고 있다.
그러나 이 협상의 결과가 「누구 누구에게 복속되느냐」는 정치의 가장 원초적 문제와 연관된 문제여서 쉽게 타협이 이룩될 수 없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모스크바=김석환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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