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대통령에 바란다/김용서 이대교수·정치행정학(기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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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위기 실체알아야 한국병 고친다/국민에 고통분담 강조앞서 설득을/목표 줄이고 정책 연속성 유지해야
1945년 8월15일 일본이 패전하던 날 장개석군대가 휴식을 취할때 모택동은 전군에 「전투는 지금부터」라는 작전명령을 하달했다. 장개석군이 대륙을 모택동에게 빼앗긴 것은 후일의 패전때문이 아니라 바로 그 순간의 정신력 차이 때문이었다.
역대 대통령의 취임식과 오늘의 차이를 좀더 의미깊게 하려면 30여년 군부정권에 종지부를 찍는 「문민정부」를 강조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오늘의 이 참담한 위기현실을 국민에게 솔직히 설명하고 「전투는 지금부터」라는 선언과 함께 구체적 행동지침을 내놓아야 한다.
국민은 지금 무엇을 해야하는가를 모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해야하는가를 묻고 있는 것이다. 이미 온몸에 확산된 암과 같이 온갖 분야에 퍼진 한국병을 어떤 방법으로 치유할 수 있을지,그것에 자신이 없는 것이다. 그런 상태에서 장미빛 「신한국」의 이미지가 과연 얼마나 설득력이 있겠는가.
○문민 강조로는 부족
더욱 우리를 우려케 하는 것은 새 정부의 체질과 그들이 시도하는 역사적 과제와 주어진 여건의 3자간에 정합성이 미약하고 서로 너무 이질적으로 비쳐지고 있다는 점이다. 즉 우리사회가 한편으로는 이미 기술전문화사회나 체계적 조직화사회에 진입하였으므로 고도의 지적 능력의 리더십을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아직도 전근대적 혁명시대 또는 난세를 돌파할 수 있는 풍운아적 투사형이 필요한 사회적 여건이 남아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장기적인 계획력이나 전문지식보다 순간순간을 돌파하는 육감,또는 본능적 판단력에만 의존해온 리더십은 부작용을 일으킨다. 제도화된 권력의 장치나 정책의 효율성 보다 권력의 탄압을 회피하거나 역공하는 수동적 자세로 길들여진 리더십도 많은 부작용을 일으킨다.
특히 성격 자체가 단순하고,독단적이며 독주형인 리더십 역시 현대국가의 복합한 두뇌기능의 절차를 무시하기가 일쑤고 편애하는 참모의 포로가 되기 쉽다. 고려말의 공민왕이 신돈에게,또는 러시아의 마지막황제가 라스푸틴의 포로가 되어 나라를 망친 예가 오늘에도 반복될 수 있다.
특히 한국은 오랜 권위주의적 정치문화 때문에 대통령의 영향력이 여전히 강하고 매우 광범하게 파급되고 있다. 한국을 공산화시키려면 수십만의 군대를 분쇄하는 노력보다 한 사람의 대통령을 함락시키는 것이 훨씬 쉽게 그 목적을 달성할 수가 있을 것이다.
○민주명분 집착말길
만일 북한의 대남전략이 신임대통령에 접근하는 것을 목표로 세운다면 역대 어느 대통령보다 그 가능성이 높을 수도 있다. 그것은 그가 오랜 탄압생활 속에서 권력에 반대하는 세력이라면 그 어떤 세력과도 손을 잡을 수 있었던 과거의 상황때문이다.
사실 과거 민주투사들의 민주주의라는 것은 곧 권위주의 권력에 저항하는 논리와 전략의 비중이 너무 컸다. 그들은 직접 탄압을 가해온 권위주의 세력이나 군부보다 같은 민족으로 다소 떨어져있는 북한에 대하여 훨씬 동정적인 태도를 보여왔다. 30년만에 되찾은 문민정부가 그러한 민주주의적 명분에만 너무 집착한다면 지금까지 체제 자체를 위협하던 세력의 득세와 도전을 어떻게 관리·통제할 수 있을까. 그리고 군부의 좌절감과 반발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민주주의에만 너무 몰두했던 장면정권이나 민주화와 통일에만 너무 집착했던 노태우정권의 인기주의가 어떠한 부작용을 초래했는가 우리 모두는 알고 있다.
지금 우리 사회는 그동안 해결되지 않고 미루어만 온 수많은 개인과 사회집단의 피해보상,인권의 회복은 물론 물가고나 사회적 혼란과 갈등·부정부패·부조리 때문에 국민속에 전반적으로 팽배해온 불평·불만이 또다시 폭발할 때가 멀지 않았다. 지금껏 정부 여당을 비난·공격하며 야당의 집권을 지원하던 북한의 대남정치 공세가 국내세력과 연계하여 또다시 강력한 투쟁을 개시하려고 지금 전열을 가다듬고 있다. 국제적으로도 우리는 선·후진국 사이의 샌드위치가 되어 매우 미묘한 입장으로 소외되고 있고,점차 불리하게 되어 간다. 특히 한일관계는 정부차원은 물론 민간차원에서도 상호 혐오속에 악화일로에 있다.
이러한 상황속에서는 정직한 대통령이나,감으로 판단하는 돌파형 대통령만으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우선은 주어진 여건이 너무 나쁘다는 점과 리더자신이 자기 능력이나 체질이 오늘의 현실적 요구와 상당한 거리가 있음을 자각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런 때 일수록 목표를 축소시켜야 하고 과거와의 단절보다 정책의 연속성을 지키며 우선 순위를 정해서 중점적으로 자원을 배정해야 한다.
○인기주의 벗어나야
국민에게도 그 이유를 설명해야 하고,그 과정에서 전임대통령의 보신을 위한 현실미화를 정확하게 정정시켜야 한다. 국민은 현실의 위기상황을 정확히 알아야 고통을 분담할 필요를 느끼게 된다.
이제는 더이상 국민을 방임시켜서는 안된다. 규제와 자율을 병행시켜야 하고 기강확립의 분위기를 때로는 강제로라도 조성시켜야 한다. 정직한 태도로 전문가들과 함께 스스로 희생하며 솔선수범한다면 다소의 무리가 있어도 국민은 이해하고 협력하지만 자기 보신주의나 측근위주,또는 인기주의,독단이나 허세일 때는 결코 따라오지 않을 것이며 이 위기는 결국 파국으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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