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대통령, 초선의원들 만나 '총선지휘' 예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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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노무현 대통령은 2003년의 마지막 점심을 열린우리당 초선의원들과 했다. 김부겸.임종석.안영근.송영길.정장선.김성호.이종걸 의원 등이 그들이다. 추어탕에 포도주도 몇잔 돌았다. 식사 2시간 내내 盧대통령은 기분이 아주 좋았다고 한다. 평소 술을 안먹는 盧대통령이지만 이날만큼은 한두잔을 걸쳤다. 한 해를 보내는 마지막 날 盧대통령은 왜 젊은 의원들과 만났고, 왜 기분이 좋았을까.

사실 이날 모임은 사전에 예정돼 있지 않았다. 다만 1주일 전쯤 열린우리당의 한 초선의원이 청와대 정무수석실에 이렇게 건의했다 한다.

"최근 대통령의 정치적 발언이 야 3당과 청와대의 정쟁구조를 만들어내 문제다. 초선의원들의 공통된 생각이니 대통령에게 전해 달라. 면담이 이뤄질 수 있으면 더 좋겠다."

1주일 만에 청와대 오찬 일정이 잡혔다. "모임의 성격으로 볼 때 盧대통령이 젊은 의원들에게 직접 자신의 총선 구상을 전하고 싶었던 것 같다"고 청와대 한 참모는 전했다. 盧대통령은 오찬 자리에서 "대통령도 국정운영을 수행해야 할 최고통수권자 이전에 정치인이다. 자신이 속한 정당이 잘 돼야 한다는 바람을 갖는 게 당연한 것 아닌가"라며 대통령의 선거 개입 범위를 선관위에 묻겠다는 뜻을 피력했다고 한다. 역대 어느 대통령도 드러내놓고 할 수 없었던 대통령의 선거 개입을 스스로 얘기한 것이다.

한 참석 의원은 "처음엔 굉장히 놀랐다"고 말했다. "이런 얘기가 나가면 총선 개입으로 파문이 클 수 있다"는 지적도 있었다. 그러나 盧대통령은 발언의 배경을 설명했다고 한다.

"과거 정권처럼 대통령은 중립을 표방하면서 국정원과 경찰.검찰 등 권력기관은 어떤 형태로든 선거에 개입시키는 짓을 해서는 안 된다. 선거는 권력기관들을 철저히 묶은 상태에서 공정하게 치러져야 한다. 이런 가운데 대통령이 법의 테두리 내에서 국정 안정을 위해 여당의 지지를 호소하겠다는 게 오히려 선거문화를 한 단계 올려놓는 것 아닌가."

이날 盧대통령은 총선 후 정계개편에 대해서도 의지를 내비친 것으로 참석자들은 분석했다.

한 참석 의원은 "'내년 총선에서 한나라당이 과반을 차지하면 정부를 유지할 수 없다'는 대통령의 발언은 정계개편을 통해서라도 내년 총선 이후는 여권이 국회 의석 과반을 차지하겠다는 의지를 담은 것 같더라"고 말했다.

이밖에도 盧대통령은 '대선자금을 비롯한 정치적 쟁점이 될 수 있는 부분에 대한 대통령의 발언은 신중해야 한다'는 의원들의 지적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한 발언들이다. 특히 10분의 1 발언도 그것을 강조하지 않으면 한나라당의 억지 주장을 인정하는 꼴이 돼 오히려 위험할 수 있어 한 얘기"라고 말했다. 그러나 盧대통령은 "열린우리당이 보다 적극적으로 활동해야 한다"며 자기 이전에 열린우리당이 적극성을 띠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고 한다. 약간의 불만 표시였다.

이수호.신용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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