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장 왜 떳떳하게 못주나/이재학 정치부기자(취재일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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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상을 준다는 것은 어떤 사람의 옳고 훌륭한 행동을 널리 알려 다른 사람들이 본받도록 한다는 취지에서 하는 일이다. 정부가 훈장과 표창장을 수여하는 것도 같은 이치다.
그런데 정부는 11일 국무회의에서 대규모 훈·포장 수여계획안을 비밀안건으로 심의해 청와대 비서실·경호실 직원 23명의 훈·포장수여를 슬쩍 끼워넣었다.
장기근속 및 정년퇴임교원 1천8백여명,농어촌 일손돕기유공자,공명선거관리에 공이 큰 1백80여명,행정쇄신에 기여한 70명,대통령비서·경호실 직원 23명 등에게 훈장 및 대통령표창 등을 주기로 심의 의결한 것을 지금까지의 관례를 깨고 그 내용을 일절 밝히지 않은 것이다. 총무처는 총리와 대통령의 결재가 남아있어 내용을 미리 밝히지 않은 것이지 비밀리에 처리한 것은 아니라고 변명했다. 교원 등에 대한 훈·포장은 매년 관례에 따른 것이므로 결코 무더기는 아니라고 강변했다.
그러나 총무처측의 설명은 납득하기 어렵다. 이미 지난 연말에 안기부장 등에 대한 훈장이 주어졌는데도 아직 공개되지 않았으며 이번에도 조용히,몰래 서훈안을 처리하고자 한 의도가 분명히 엿보인다. 대통령이 임기말에 주는 훈장에 무엇인가 떳떳하지 않은 구석이 있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대통령이 임기를 마치며 고생해준 청와대 직원들에게 훈장을 주고 싶은 것은 인지상정 차원에서 이해해줄 수도 있다. 총무처의 설명대로 『이번에는 국가발전에 기여한 공이 각별한 사람들로만 엄선했다』면 왜 보다 당당하게 못했는지 궁금하기 짝이 없다.
서울대 병원 산부인과과장(이진용)이 국가발전에 어떤 기여를 했는지 설명하기 어려웠기 때문일까. 아무리 대통령이 퇴임을 앞두고 있다 해도 개인적 호의 표시로 훈장이 남발되는 것은 국가기강 차원에서도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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