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카우트가 뭐 길래…|돈에 무너진 탁구사제 5년의 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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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명지여고탁구팀의 김 석(40)코치는 이제 탁구가 싫어졌다.
5년간이나 애정을 쏟아 키운 선수가 금전을 앞세운 실업팀의 스카우트공세에 굴복, 하루 아침에 자신을 배신할 줄은 정말 꿈에도 상상 못했기 때문이다.
김 코치의 사연인즉 이렇다.
올해 3학년으로 진학하는 팀의 에이스 한광선에 대한 실업팀들의 스카우트 손길이 뻗치기 시작한 것은 지난해 10월의 전국체전 때부터.
한은 여고랭킹 11위의 실력에 불과하지만 1m70㎝의 좋은 체격조건에 오른손 파위드라이브가 돋보여 대우증권·대한항공·한국화장품의 실업3개 팀이 나름대로 관심을 보였다.
결국 줄다리기 끝에 별도의 스카우트 비를 제시하지 않은 대한항공이 탈락하고 1천5백 만원 정도의 엇비슷한 스카우트 비를 내세운 대우증권과 한국화장품의 2파전으로 좁혀졌다.
여기서 김 코치는 같은 조건이라면 입단 후에도 주전선수로 빛을 볼 수 있는 대우증권 행이 바람직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갖게 됐다.
한국화장품에는 한국여자탁구의 쌍두마차인 현정화와 홍차옥이 버티고 있고 만약 이들이 은퇴한다 해도 상비 1군인 육선희와 수비전문의 유혜정, 양미라 등 괜찮은 선수들이 즐비, 한의 실력으로 보아 주전기용이 어렵다고 생각됐기 때문이다.
반면 대우증권은 정지영이 은퇴, 에이스 이정임과 함께 복식 조를 구성하는 등 당장 주전으로의 기용이 가능해 선수로서의 성장에 절대 유리한 형편.
게다가 선수빈곤에 허덕이는 대우증권은 한국화장품과는 달리 스카우트대상이 못되는 한의동료 1∼2명을 더 받을 수 있다는 좋은 조건이었다.
그러나 최종결정은 선수의 선택 외에도 부모의 승낙을 받아야 하는 문제여서 제주도에 거주하는 한의 부모가 상경하면 각 실업팀을 두루 살펴보게 한 뒤 학교측, 부모, 선수의 3자가 한자리에 모여 의논해 결정키로 했다.
하지만 한의 부모는 김 코치와 약속한 날짜보다 하루 일찍 상경, 김 코치와는 일언반구의 상의도 없이 한국화장품 측과 가계약을 맺고 말았다.
한 선수를 대동하고 공항에 나타나 1천5백 만원의 거액을 코트에 찔러 넣는 한국화장품 코칭스태프의 기민함(?)에 두 손을 들고 만 것이다.
이 같은 사실을 까맣게 모른 채 이튿날 한의 부모와 함께 각 실업팀을 돌며 스카우트 조건 등 현황을 설명하던 김 코치는 뒤늦게 한의 부모가 실토하는 이 사실을 듣고 그만 어안이 벙벙해지고 말았다.
팀 선택은 부차적인 문제였다.
자신이 아무리 못난 지도자라 해도 한이 명지여중 1년 때부터 5년간이나 한솥밥을 먹으며 키운 스승인데 어떻게 한마디 상의도 없이 이럴 수가 있는가 하는 절망감 때문이었다.
김 코치는 미안해서 이젠 코치선생님 얼굴조차 제대로 쳐다보지 못하는 한과 함께 졸업 때까지의 남은 1년을 지낼 수 없다고 판단, 사표를 쓰기로 했다.
스카우트문제는 차 치하고 갈 갈이 찢긴 사제지정에 마음 아파하던 김 코치에게 한국화장품의 코칭스태프는『이렇게 안 하면 어떻게 스카우트싸움에서 성공할 수 있느냐』며 득의양양해 했다. <유상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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