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리시험서 확인된 사회의 “불감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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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그게 무슨죄냐” 만연한 한탕주의/“청년의 기백과 양심을 돈에 팔다니”/교사가 학생이용해 돈벌이 더 충격
대리시험을 봐준 혐의로 경찰의 수배를 받다 자수한뒤 카메라플래시 앞에서 「참회」의 눈물을 흘리던 노혁재군(22·연세대 의예과1)이 이미 밝혀진 두차례 범행외에 또다른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드러났다.
특히 충격을 주는 부분은 검찰고위간부 아들로 누가 봐도 풍족한 생활을 누리며 자란 것같은 노군이 단지 용돈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세차례나 「태연히」 똑같은 범행을 저지른 점으로,이는 요즘 젊은세대의 가치관이 뭔가 제자리를 잃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이다.
노군이 세차례에 걸쳐 받은 금액은 밝혀진 1천9백만원 외에 이번 전문대대리시험 수고비까지 합쳐 3천만원 가까이 이르는 것으로 추산된다.
『주 3만원 용돈이 모자랐다』고 말해 요즘 보통대학생들의 손 큰 씀씀이를 짐작케 했던 노군은 결국 청년의 기백·양심을 돈뭉치에 팔았다는 비난을 면키 어렵게 됐다.
노군 뿐 아니라 나머지 대리응시생들도 나쁜 짓인줄 뻔히 알면서도 대리시험이 「보장」한 큰 돈의 유혹에 쉽게 넘어간 사실은 병화된 세태를 충분히 읽게하는 부분이다.
고려대 법학과 1년생 이명희양(20)은 공부를 열심히 해 장학금으로 학비를 버는 상식적인 방법보다는 한번 대리시험에 5백만원이 보장되는 쉽고 빠른 길을 두번씩 택했다가 쇠고랑을 찼다.
3수끝에 올 고려대법학과에 합격한 송형렬군(21)은 자신의 학비를 대주던 누나(27·쇼핑센터 점원)가 지난 91년 사고를 당해 일할 수 없게 되는 바람에 학비마련이 막막해졌음에도 굴하지 않고 지난해엔 6개월동안 막노동판을 전전하는 등 스스로 학비를 마련해 가며 바라던 대학에 합격하는 뜨거운 학구열을 보여 주위 사람들의 칭찬을 한몸에 받았으나 6백만원이라는 거금의 유혹에 빠져 법관의 꿈은 펴보지도 못하고 말았다.
문제는 이같은 불법행위에 대해 이들이 별다른 죄의식을 느끼지 않는 「불감증」에 걸려 있다는 것.
각종 학내 시험에서 대리시험·커닝에 익숙해진 탓도 있지만 정의감이 도처에서 상실된 사회분위기 영향도 크다는게 전문가들의 한결같은 진단이다.
올해 후기대 입시에 한양대 안성캠퍼스 경영학과에 지원한 김모군(20)의 대리시험을 치른 이한웅군(21·연세대 경영학과1)은 수사관들의 조사를 받은뒤 『이게 그렇게 큰 죄가 되나요』라고 반문해 자신의 무감증을 스스로 드러내기도 했다.
이들의 공통점은 수만원에서 많을 때는 20만∼30만원씩 용돈을 줘가며 소위 「고객관리」를 해온 이번 사건의 주범 신훈식씨(33) 등 입시브로커들의 꾐에 속아 그들의 「간절한」 부탁을 끝내 뿌리치지 못하고 서서히 돈의 올가미에 걸려 수렁에 빠져든 데 있다.
1차적으로는 미성년자나 다름없는 학생들을 이용한 신씨 일당 등 입시브로커들의 그릇된 행위가 비난받아 마땅하다.
『엄청난 빚더미에 앉아있다보니 어쩔수 없었다. 들통날걸 각오하고 일을 벌였다』고 말한 주범 신씨는 결국 이들 대학생들의 창창한 앞날까지 자신의 도박에 건 셈이다.
그러나 그의 간덩이 큰 범행규모와 평소의 행적을 보면 「빚 때문에…」란 말은 거짓말임이 금방 드러난다.
교사라는 신성한 직책을 치부의 수단으로 악용한 프로사기꾼들이 학생들마저 오염시켜 「사제동업」을 한꼴이 됐다.
그러나 학생이라고 이미 성년이 다된 젊은이의 책임이 면제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들을 조사해온 담당수사관은 『불법·부정이 개입된 사실을 알았다면 청년답게 돈의 유혹을 과감히 떨쳐야 했다』고 말했다.
이런 점에서 올해 연세대 영문과에 합격한 최모양(19)이 입시브로커 김세은씨(37)의 덫에 걸렸으나 김씨가 3백만원이 입급된 저금통장을 꺼내놓고 『한번만 사정을 봐달라』며 대리시험을 종용하는 본색을 드러내자 친구집에 피신까지 하며 유혹을 뿌리친 사실은 돈에 젊은을 판 이들 대리시험 학생들의 비굴한 태도와는 큰 대조를 보였다.<한창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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