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EAI 대선 정국 분석해 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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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정치 제도에 비해 정치 지도자의 자질과 역할이 더 중요한 것은 우리의 과거 경험이자 오늘의 현실이다. 그런 점에서 이번 중앙일보-EAI 공동 조사결과는 한국 정치의 퇴행성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전.현직 대통령, 유력 대선 주자들의 영향력과 신뢰도가 기대 이하로 낮게 평가됐기 때문이다. 이번 조사에서 나타난 특징은 다음 세 가지다.

첫째, 정치인에 대한 불신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다. 영향력에 상응하는 신뢰도를 보여준 정치인은 대선 후보 지지율 1, 2위인 이명박.박근혜 두 후보뿐이다.

그나마 5.64점(이 후보)과 5.38점(박 후보)에 불과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신뢰를 받고 있는 정치인 점수가 5점대(10점 만점)에 그친 것이다. 이들조차 국민으로부터 그리 높은 신뢰를 받고 있다고 보기 어렵다고 나타냈다.

둘째, 범여권 대선 주자군에 대한 평가는 더욱 심각하다. 국민의 눈에 비친 그들의 영향력과 신뢰는 미미하기 짝이 없다. 손학규 전 경기지사를 제외한 나머지 주자들은 영향력과 신뢰도 평가에서 2점대였다.

범여권 대선 주자들이 집권 말기의 현직 대통령보다도 낮은 영향력과 신뢰를 받고 있는 것이다. 전례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 셈이다. 이런 상황에서 후보의 난립 현상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할지 당혹스럽기만 하다.

셋째, 일선에서 물러난 정치인에 대한 향수와 기대감을 엿볼 수 있다. 현역 정치인의 리더십과 신뢰에 대한 회의 때문일 것이다. 이들에 대한 집단적 불신이 옛 정치인에 대한 그리움과 호감으로 표출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대선 정국에서 이명박.박근혜 두 후보 다음으로 큰 영향력을 가진 것으로 평가됐다. 대선 정국에서 호남 표를 결집할 수 있고 대선 후보군에 대한 조정 능력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란 평가가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는 영향력 5위에 신뢰도 3위라는 높은 평가를 받았다. 이런 결과가 나타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 같다. 이명박.박근혜 두 후보의 경쟁이 지나칠 경우 집권이 어려울 것이란 불안감이 지난 대선 때의 '이회창 대세론'을 회상케 한 것 같다. 한나라당 내 중진.원로 정치인 대부분이 양쪽으로 갈라진 상황에서 두 후보의 과열 경쟁에 대한 완충.조정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란 기대감이 아닐까 싶다.

이번 정치인 신뢰도 평가는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정치인에 대한 신뢰는 유권자의 기대를 실현시켜 줄 것이라는 일관된 믿음의 결과며, 이는 실제적 활동이나 실적을 기반으로 장기적 평가에 의해 형성된다는 점이다. 쉽게 구축되지 않지만 일단 형성되면 잘 와해되지 않고 반대로 한번 무너지면 쉽게 회복하기 어려운 특징도 있다.

정치적 불신과 냉소가 팽배할 경우 정치인들은 자신의 정책을 토대로 국민을 설득하거나 자발적 동의를 이끌어내는 데 큰 곤란을 겪게 된다. 가령 노무현 대통령의 경우 단기적인 지지도 상승에도 불구하고 국정운영에 어려움을 겪게 되는 일이 많은데, 그렇게 된 주요 이유 중 하나가 정치적 신뢰기반이 취약해졌기 때문이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올 대선이 한나라당에 매우 유리한 반면 범여권에는 아주 힘겨운 상황으로 전개될지도 모른다. 쉽게 변할 수 있는 지지율과 달리 정치인에 대한 신뢰는 장기적으로 형성된 믿음에 바탕한 안정적 정치 자산이기 때문이다.

지지율이 반영됐긴 했지만 그런 점에서 이.박 두 후보가 신뢰도 1, 2위에 오른 것은 한나라당 입장에서 큰 자산이다. 범여권 입장에선 남은 기간 동안 지지율 따라잡기뿐 아니라 정치적 신뢰까지 끌어올려야 하는 과제를 안게 된 셈이다.

이내영 고려대 교수.EAI 여론분석센터 소장

조사 어떻게 했나

전.현직 대통령과 유력 대선 주자들이 대선 정국에 미치는 영향력과 신뢰도를 평가한 이번 여론조사는 동아시아연구원(EAI)이 질문 항목을 설계하고 중앙일보 조사연구팀이 전화 조사와 자료 처리를 담당했다.

이번 조사는 중앙일보와 EAI가 3년 연속 공동으로 실시한 25개 파워조직의 영향력.신뢰도 여론조사의 조사설계를 원용했다.<본지 7월 3일자 1, 8면>

파워조직 대표 인물에 대한 일반 국민의 인지도가 낮아 전.현직 대통령과 유력 대선 주자 11명을 대상으로 조사를 기획 실시했다. 대선 정국에서의 영향력 조사는 인물별로 '전혀 영향력 없음'(0점)부터 '매우 영향력 높음'(10점) 사이에서 선택하도록 했다. 신뢰도 역시 '매우 불신'(0점)에서 '매우 신뢰'(10점) 사이의 점수로 응답하도록 했다. 각 인물의 점수는 평균값이며, 0점에 가까울수록 영향력과 신뢰도가 낮고 10점에 가까울수록 높다는 것을 의미한다. 두 인물 사이의 영향력과 신뢰도 점수 차이가 0.15점 이하일 경우 통계적 순위는 의미가 없다.

정한울 연구원 (EAI 여론분석센터 부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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