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중전화기 옮긴 사연(촛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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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서울 구로경찰서 형사계 한 귀퉁이에 설치돼 있던 공중전화기 두대가 25일 갑자기 이전됐다. 카드전화기는 형사계 사무실 한 가운데 있는 기둥벽에,동전전화기는 형사계 밖 복도 벽면에 어색한 모습으로 옮겨진 것이다.
면회인 등 경찰서에 들른 일반인들이 이용하는 이들 전화기가 이날 갑작스레 원래 자리를 떠난 사연인즉 이렇다.
21일 지하철안에서 1만7천원을 소매치기해 구로경찰서 형사계 보호실에 들어와 있던 김종필씨(20·무직·인천시 만수1동)는 이날 오후 10시30분쯤 갑자기 배를 움켜쥐며 당직형사에게 통사정을 했다.
『배가 아파 약이 필요해서 그러니 집으로 연락할 수 있도록 해달라.』
별 생각없이 순경 한 명을 붙여 예의 그 공중전화기를 사용토록 한 당직형사가 「아차」한 것은 때마침 걸려온 전화를 받느라 잠시 김씨로부터 눈을 뗀 사이.
이때를 놓칠세라 김씨는 줄행랑을 쳤다.
일선 경찰서에 설연휴 방범 비상령이 내린 시기,경찰이 빤히 눈을 뜨고 있는 가운데 형사피의자가 도주한 이 사건의 책임은 애꿎게도 말없이 붙어 있던 공중전화기에 돌아갔다.
『당직 형사의 감시 소홀도 있지만 그 놈의 전화통이 문제다』 그래서 민원인용 전화를 아예 밖으로 옮겨 경찰관이 사무실전화를 받느라 감시를 소홀히 하는 일이 없게 조치된 것이다.
수사관 14명을 인천의 김씨 집으로 급파하고도 도주 5일이 지나도록 검거되지 않자 한 경찰간부는 『경찰이 친절봉사 운동이니 뭐니해서 피의자 요구를 다 들어주다 보니 이같은 일이 생긴 것』이라며 얼토당토 않는 변명을 늘어놓았다. 다른 한 경찰간부는 『기껏 1만7천원짜리 소매치기범인데 굳이 도주 사실을 보도할 필요가 있겠느냐』고 출입기자들에게 「보도자제」를 요청하기도 했다. 달아난 범인은 25일 오후 자수해와 사건은 한토막 해프닝으로 끝났지만 궁색한 변명과 책임회피,그리고 사실 은닉으로 일관하는 「민중의 지팡이」를 보면서 만약 소매치기범이 아닌 강력범이 도주했더라면 이들은 또 무엇을 어떻게 둘러댔을지 궁금했다.<하철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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