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화학무기 보호 “시간벌기”/이라크 「계산된 도발」의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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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사찰회피로 남은 생산시설 유지 속셈/대량파괴무기 잃을땐 “중동강국” 흔들
이라크가 전폭기·미사일공격을 잇따라 받으면서도 완전히 굴복하지 않는 것은 유엔이 실시하고 있는 핵무기·화학무기 등 대량파괴 무기에 대한 사찰을 회피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는 새로운 해석이 나오고 있다.
말린 피츠워터 미 백악관 대변인은 대이라크 2차공습이 있은 직후 미군은 바그다드 인근 핵농축시설 부품공장을 공격했다고 발표.
걸프전으로 재래식 무기의 절반이상을 잃은 이라크는 이들 대량파괴무기들마저 모두 잃게될 경우 중동지역의 강국으로서 지위를 상실하게 될 것을 우려해 유엔의 사찰을 피하기 위한 「시간벌기 작전」을 벌이고 있다는 것이다.
이라크 최대의 경쟁자로 8년동안 전쟁을 벌였던 이란이나 이웃한 시리아 등이 최근 북한으로부터 스커드미사일 등 중·장거리 미사일을 비롯한 각종 무기들을 대량 수입하고 화학무기 등 대량 파괴무기를 다량 보유,군사력 강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으며 이스라엘 역시 이라크의 경계대상이다.
이라크는 지금까지 여러차례 유엔사찰단 활동거부로 외부세력에 의한 대량파괴무기 폐기를 면하려는 의도를 드러내 보였다.
이라크는 지난해 2월과 3월에 걸쳐 유엔사찰팀이 신경가스 로킷을 찾아내 폐기하려 하자 이를 가로막았다.
유엔사찰팀이 철수하고 연합군들이 군사공격을 준비하는 등 막바지에 이르자 이라크는 로킷폐기에 동의했으나 당시 사찰팀은 모두 4백기로 추정되는 등 로킷중 40기는 끝내 폐기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라크는 같은 시기 스커드미사일의 생산시설 파괴요구에 대해서도 이 시설을 사정거리 1백50㎞ 이내의 미사일 생산시설로 전환하거나 민수용으로 돌릴 수 있는 것이라는 점을 내세워 시설파괴를 거부했으며 국제원자력기구(IAEA)가 핵무기 생산능력을 갖춘 것으로 지적한 바그다드 인근 알 아테르 핵단지의 파괴도 거부,미국이 항공모함 아메리카호를 걸프해로 파견하는 등 일촉즉발의 상황까지 간 적이 있다.
이라크는 또 지난해 7월 각종 무기개발계획서를 감춰둔 것으로 알려진 농무부건물에 대한 사찰 때도 주권침해임을 내세워 국민적 저항을 일으키고 사찰대상물들을 차량에 싣고 시내를 배회하는 방법으로 강력히 저항했었다.
이라크는 지난해 10월9일 한걸음 더 나아가 10월 중순으로 예정됐던 사찰단의 입국을 조지 부시 미 대통령이 선거전에 악용할 수 있다는 주장을 펴면서 미 대통령선거가 끝나는 11월3일 이후로 연기해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이번 위기 역시 약 70명의 대규모 유엔사찰단이 이라크로 가기위해 인근 바레인의 수도 마나마에서 대기중이던 지난해 연말부터 시작됐다.
지난해 연말 남부 「비행금지구역」상공에서 있은 미군 전투기의 이라크기 격추사건은 이라크기가 미군기에 먼저 미사일을 발사해 일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사건직후 이라크는 연합국들이 일방적으로 설정한 「비행금지구역」이 제거되고 유엔의 경제봉쇄조치로 비행이 금지되고 있는 이라크 국적기들의 비행이 허용되지 않는 한 유엔사찰단 역시 육상교통편으로만 입국할 수 있다면서 사찰단 항공기의 입국을 거부하겠다고 발표한 것이다.
로버트 게이츠 미 중앙정보국(CIA)국장은 지난 15일 『후세인 이라크대통령의 야심이나 통치방식이 변화했다는 징후는 전혀 없다』고 지적하고 『남아있는 대량파괴무기 생산시설을 유지하려고 시도하고 있는 것을 알고 있으며 스커드미사일을 상당수 숨겨둔 것으로 추정된다』고 주장한 바 있다.
그동안 상당한 성과를 거둔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 유엔 사찰이 모두 끝나 이라크가 보유한 대량파괴무기가 완전히 없어졌다는 것이 확인된다면 이라크는 종이호랑이가 된 셈이다.
이 경우 이라크는 중동지역에서 정치·군사적 영향력을 상실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후세인은 지난 20여년동안 수많은 고비를 넘기며 공고히 해온 권좌를 한순간에 잃게 될 가능성이 크다.<강영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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