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전자전…어머니도 인사 청탁 거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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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25면에서 계속>
서울로 이사와 명문 경기 중을 거쳐 경기 고에 입학한 김씨는 고교 2학년을 마치고 검정고시를 치러 56년 서울대정치학과에 합격했다. 수재중의 수재들만 모였던 당시의 경기 고에서는 중도에 자퇴하고 검정고시로 거뜬히 서울대에 입학하는 사례가 가끔 있었다.
취직 문이 좁다기보다는 아예 문 자체가 없었다고 해야 할 정도로 직장 구하기가 어려웠던 60년에 대학을 졸업한 김씨는 한국은행 입행 시험을 수석으로 통과해 사회에 발을 내디뎠다. 이어 68∼73년 사이에 미국 스탠퍼드대에서 통계학석사· 경제학박사 학위를 따내면서 「한국의 천재」로 이름을 떨치게 된다. 그의 실력이 알려지면서 이미 7O년대 중반에 사우디아라비아·덴마크 같은 나라에서 김씨를「수입」해 가려고 시도한 적도 있다고 한다.
김씨의 대학 1년 선배로 최근「경제자율화의 기수 김재익」이라는 제목의 논문을 완성, 고려대 행정문제연구소를 통해 출간할 예정인 백완기 교수(57·고대행정학과)는 논문에서 대학시절의 김씨에 대해 한가지 일화를 들었다.

<한은 입행 때 수석>
『그와 나는 한태연 교수의 행정법강의를 같이 들었다. 시험을 보는데 한 교수는 배우지도 않았고 교과서에도 없는 문제를 내놓고 그냥 나가 버렸다. 학생들 모두가 참고 자료를 내놓고 썼다. 마침 필자(백씨)에게 참고될 만한 자료가 있어 옆에 앉은 그에게 건네주었다. 그는 고맙다는 자세로 정중하게 받았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자료를 들추지 않고 그냥 답안을 쓰고 나서 고맙다고 하면서 그 자료를 돌려주었다. 필자는 몹시 부끄러움을 느꼈다. 그는 잘난 척 하는 선배의 호의를 겸손하게 받아들이면서도 자기의 순수성을 지키고 있었다.
「5공경제의 일등공신(이학봉 전 민정수석)」인 김 수석은 동시에「대단한 원칙론 자(허화평 전 정무수석)」라는 평처럼 자신의 소신에 대해서는 결코 굽히지 않는 올곧은 면이 있었다. 상황에 따라 강약과 완급을 조절해 가며 자신의 믿는 바를 관철해 나갔다. 이런 면에서는「교과서 같은 사람」이라는 일반의 인식은 다소 잘못된 듯하다.
82년 실명제 파동당시 청와대비서관으로 실명제 전면 실시를 반대하는데 앞장섰던 P씨는 김 수석에 대해『태도가 아주 부드럽고 겸손한 사람이지만 매서울 때는 대단히 매섭더라』 며 자신이 당한 경험을 털어놓았다.
『내가 실명제의 부작용에 대해설득하고 돌아다니자 하루는 나를 자기 방으로 부르더군요. 갔지요. 김 수석이 대뜸 하는 말이「이보세요. 옛날 중국에서는 말이죠, 전쟁 같은 변고가 났을 때 장안에서 지레 겁을 먹고 고함지르고 다니는 자들을 수십 명 본보기로 잡아다가 목을 친다고 합디다」라는 거예요. 내가 실명제의 위험한 측면을 주장하는 것을 빗대 까불면 날려 버리겠다는 경고였겠지요. 그 얌전한 김 수석이 이렇게 무서운 말도 할 때가 있구나 하는 생각에 소름이 끼치더군요.』공사 양면에서 완벽에 가까웠던 김 수석은 자신의 고집으로 인해 손해를 자초한 측면이 있었고, 심지어는「대학 때 사회주의관련 책을 많이 읽어 사상이 의심스럽다 더 라」는 정체불명의 뜬소문이 돈 적도 있었다.
경제수석으로 외부기관에 강의를 나갔을 때는『어차피 내 업무였다』며 강사 료를 받지 않겠다고 버텨 관계자들의 애를 먹였고, 굳이 받기를 강권하면 누님이 있는 수녀원으로 그 돈을 보내게 할 정도였다.
『심지어 재벌기업 회장들을 만나 식사모임을 갖고 경제 현안에 대해 설명한 뒤에도 식사 대는 꼭 김 수석이 냈어요. 안 그래도 돈을 주고 싶어 안달하는 사람들인데 자기들이 먹은 식대를 경제수석이 치러 주니 그 기업인들이 불안하게 느끼지 않겠어요. 내가 보다 못해. 김 수석, 일은 철저하게 하더라도 자기 주변에는 좀 너그러운 구석이 있어야 되는 법이오. 기업인들이 오면서 많아야 수십만 원 되는 식대를 준비해 오지 않을 리도 없는데, 너무 완벽하게 하면 오히려 적을 만드는 결과가 됩니다」 라고 충고한 일도 있습니다. 그래도 그는 자기 원칙을 끝까지 지켰어요. 여하튼 범인이 아닙니다.』(수석비서관출신 A씨)

<강사 료 받기 꺼려>
1983년 10월, 아웅산 사건으로 김재익 수석이 순국한 뒤 아들의 죽음을 비통해 하던 모친 (강병주 여사·당시 88세)도 얼마 후 피를 토하며 세상을 떴다. 김 수석 사후 칠일만에 아들의 뒤를 이은 것이었다. 며느리 이 교수는 시어머니의 유품을 정리하다가 장롱 속에서 한 보따리의 이력서뭉치를 발견했다. 아들에게 전해 달라는 인사 청탁을 모친은 일절 무시하고 아예 말도 꺼내지 않았던 것이다. 그 중에는 6·25때 희생된 강 여사의 남편, 즉 김 수석의 부친 시신을 혼란 중에 거두어 염해 주고 장례까지 치러 준「가문의 은인」이 자신의 자손을 부탁하며 보낸 이력서도 있었다. 그 기막힌 이력서마저 모친은 아들에게 보여주지 않았던 것이다.「그 어머니에 그 아들」이었다. < 노재현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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