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증 같은 정서 그대로 표출연기 자연스럽게 하는데 도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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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후남이 김희애(26)는 백지 같은 여자다.
어떤 색깔의 물감을 칠해도 잘 묻어 나오는 배우다. 청순한 여고생의 초록빛 이미지부터 시골 아낙의 황토 빛 몸짓과 전문직 독신여성의 무채색 분위기까지 자유자재로 자신을 드러낼 줄 아는 연기자다.
85년 MBC-TV 드라마『여심』의 여주인공으로 연기 생활을 시작한지 8년만에 연기 같지 않은 세련된 연기를 한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그녀의 저력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연기는 연습도 중요하지만 끊임없이 토해 내고 싶은 응어리 같은 것이 가슴 한구석에 있어야 되는 것 같아요. 위로 받고 싶은 상처나 보여주고 싶은 꿈 같은 것들 말이에요.』
상처를 응시하려는 노력이외에 특별히 작위적인 연습을 하지 않는 게 비결이라는 그녀. 남들이 듣기에 이해하기 어려운 연습방식일지 모르지만 자신의 정서에는 이 방법이 너무나 자연스럽다고.
『어릴 때부터 이상하게 우울증 비슷한 게 있어서 어떨 땐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기분이 가라앉곤 했어요.』
그녀는 책상엔 오래 앉아 있었지만 공부는 못하는 아이였다. 책보다는 창 밖의 빈 하늘에 시선을 두고 몽상에 잠겨 있을 때가 많은, 가까운 것을 사랑하기보다는 멀리 있는 것을 그리워하는 그런 아이였다. 보고 싶은 많은 사람들, 하고 싶은 많은 일들이 그냥 생각 속에 파묻혔다.
그러다가 연기를 시작하면서 그녀는 그때 몽상의 기억들을 하나둘씩 끄집어낸다.
『내가 맡은 모든 극중 배역들이 언젠가 한번은 만나본 것 같은 기분이 들 때가 많아요. 아마 내가 어릴 때부터 마음속에서 무수히 그려내고 지우고 했던 사람들 중의 한 명이겠지요.』
결국 그녀의 연기를 세련되게 하고 그녀를 나이보다 성숙하게 보이게 만든 것은 우등생 책장 넘기듯 자주 잡생각을 하게 해준 우울증 덕분인 셈이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연기생활을 한 이후부터는 이 우울증이 사라졌다고 한다. 그래서 몽상에 잠겨 있느라 미처 못한 공부에 대한미련 때문에 지난해엔 모교인 중앙대에서 방송 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그리움의 대상들을 극 속에서 대신 만나는 것이 큰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해주었던 것 같아요.』
지금도 새로운 배역을 맡을 때마다 여전히 미지의 지인을 다시 만나는 기분이 든다는 그녀. 지난 8년간의 연기생활을 통해 그녀는 어쩌면 자신의 꿈과 만나고 헤어지는데 익숙해지는 방법을 배우고 있었는지도 모른다고 한다.
『다시 태어나면 선창 가의 조그만 술집에서 작부 노릇을 한번 해보고 싶다는 어느 여류 방송극작가의 넉넉한 안목이 부럽다』는 그녀는 확실히 조숙한 스물 여섯이다. <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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