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씨개명」아이누족 사례 원용했다/일 교수,국회도서관서 자료발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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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조선총독부 요청에 북해도서 자료보내/경위·방법 상세히 기록… 식민사연구 공백메울 사료
1940년 2월 일제하 조선총독부의 조선민족문화말살정책의 일환으로 단행된 창씨개명에 19세기이래 아이누에 대한 창씨개명정책이 그대로 원용됐음을 밝혀주는 공문서가 최근 일본국회도서관 헌정자료실에서 발견돼 관계학자들의 비상한 관심을 끌고 있다.
일제의 식민통치지배가 이루어진 조선·대만의 식민지경영정책에는 그 이전 이미 식민지로 편입된 북해도 아이누와 오키나와의 「성공사례」가 많이 도입되었을 것으로 추측되어 왔으나 이번 창씨개명관련 공문서의 발견으로 입증돼 일제시대사의 공백부분이 메워질 것으로 우리 학계도 이번 발견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북해도대학에서 한국사를 전공하고 있는 이노우에 가오리(정상훈·교육학)교수가 우연히 헌정자료실에서 찾아낸 공문서는 중앙부분에 「조선총독부」를 명기한 총둑부괘지 8장. 내용은 동경에 사무소를 둔 조선총독부 법무국장이 소화15년(1940) 1월30일 북해도청과 화태청(사할린)장관 앞으로 「씨의 설정에 관한 건」이라는 제목아래 보낸 문건 각 1장과 이에 대해 북해도청 학무부장의 응답서 4장,화태청장관의 응답서 1장,이들 문건을 다시 총독부 정무총감에게 보고한 공문 1장 등이다.
한반도에서 창씨개명을 시행하기 직전의 상황에서 아이누에 적용된 조례나 법령을 참고하려는 목적에서 급히 발송된 이들 문건은 ▲아이누의 창씨경위 ▲창씨방법 ▲아이누인구현황(당시)을 일목요연하게 보여준다.
북해도청의 응답서에 따르면 아이누민족이 일본식으로 창씨개명하게 된 시기는 1871년 호적법 공포때로 거슬러 올라가며 호적조사당시 아이누인을 일률적으로 평민으로 편입시키는 한편 창씨의 방법은 호적계담당관리가 자의적으로 선택,기록한데 따른 것으로 알려졌다.
예를 들면 「토산로크」라는 성씨는 이두식으로 호잔으로,지명에서 유래한 집단촌은 평촌·이곡으로 통일시켰다.
우리나라의 경우 김씨를 가네무라(금촌)로,이씨를 기무라(목촌)로 창씨개명한 것도 아이누의 방식을 그대로 본뜬 것으로 이 응답서가 근거로 된 것으로 보인다.
특히 사할린의 경우 노일전쟁직후인 1909년 「토인호구계출규칙」으로 자발적인 창씨를 권장했으나 잘 이행되지 않자 1932년 「칙령제7호」를 내려 일본호적법을 그대로 적용,강제로 전원 창씨개명토록 한 사실도 공문서는 생생하게 밝혀주고 있다.
이들 공문서를 종합하면 당시 아이누의 등록인구는 ▲북해도 1만6천2백4명 ▲사할린 1천2백74명 등 모두 1만7천4백78명으로 집계되고 있으나 호적을 꺼린 기피자를 합하면 현재 우타리협회에 등록된 2만5천명 수준은 될 것으로 관계학자들은 추정한다. 현재 북해도지역의 일본인은 1백배(3백50만명)로 불어난데 반해 아이누인구는 그대로 정체상태에 있다.
이 공문서를 발견한 이노우에교수는 문서의 왕복시기가 조선에서 황민화정책의 일환으로 「조선민사령개정」(창씨개명령)이 이루어진 직전이라는 점에서 「아이누통치방식의 조선화」를 입증하는 자료라고 확신했다.
한편 아이누역사를 연구하고 있는 연세대 정병호(사회학)교수는 『창씨개명이 아이누의 창씨방식을 밑바탕으로 이루어진데 새삼 분노를 느낀다』고 말하고 『앞으로 조선·대만·북해도·오키나와를 묶어 일제통치사를 연구해야할 과제를 이 자료가 제기했다』고 높이 평가했다.<삿포로=방인철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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