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미덕으로 통하는「이중 구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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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우에키라고 하는 20대 가수가 신곡을 발표했을 때의 일이다. 그는 기자회견에서 이런 말을 했다.『이젠 좀「혼네」로 살까 했는데 신곡을 냈으니 또「다테마에」로 살수밖에 없게 됐다.』
나 살고 싶은 대로 살려고 했는데 새 노래를 히트시켜야 하니 여기저기 머리 숙여 가며 또 마음에도 없는 짓을 해야 할 판이라는 뜻이었다.
「다테마에」라고 하는 앞에 내세우는 명분과「혼네」라고 하는 뒤에 감추고 있는 실리가 다르다는 이 인간 관계의 2중 구조는 흔히 일본인을 말할 때 쓰여지는 키워드 같은 것이다. 한마디로 겉과 속이 다르다. 우리 같으면 겉 다르고 속 다른 놈으로 매도돼 마땅한 일이다. 그러나 이 2중 구조가 일본인에겐 예의의 하나며 일종의 교양이고 사회적 덕목이 되는 것을 볼 때의 망연함은 경험해 보지 않고는 이해하기 힘들 정도다.
속을 다 털어놓고 상대방에게 이야기해서는 일종의 실례가 된다고 나 할까. 그러니,『자 우리 탁 터놓고 이야기합시다』하고 협상을 시작하는 겉 덕성으로 생각하며 우리가 일본인과 협상을 시작했다 간 판판이 깨 질(?)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하다.
이런 2중구조의 하나에「우치」와「소토」라는 것도 있다.
우치는 우리들의 안쪽이고 소토는 남과 밖이다. 우리편이냐, 남이냐를 그렇게 철저히 구분할 수 없는 곳이 일본이다. 거의 같은 무게로 내 쪽 일이냐, 바깥일이냐가 또 그렇게 구분된다.
일본인을 친구로 가진 많은 외국인들이 한결같이 하는 말이 있다. 일본인은 좀처럼 속을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 일본인은 자기 집에 좀처럼 손님을 초대하지 않는다는 말들을 많이 한다.
바로 이 우치와 소토가 만들어 내는 일본인의 심상에 도사린 2중구조의 하나다. 나의 안쪽을 좀처럼 남에게 내 보이지 않으려 하고 남을 내편으로 끌어들이기를 두려워하는 일본인이다.
이 우치와 소토가 무너지는 놀랍고도 이상스런 현장이 있다. 비 그친 날 아침의 아파트베란다다. 베란다에 내 걸리는 빨래와 이불들…. 나는 그것을 보며 거의 경악할 정도로 놀랐었다. 자기를 그렇게 드러내기 싫어하고 부끄러워하는 일본인이 어떻게 저럴 수 있을까 하는 놀라움이었다.
물론 일본의 주택구조 때문에 집안에는 늘 습기가 차 있다던 가. 그래서 햇빛 잘 드는 집의 집세가 비쌀 정도라든가 하는…. 빨래나 이불을 내걸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는 얼마든지 있다.
그래도 그렇다.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의 경우 아래층엔 공동으로 빨래를 말리는 자동 건조기가 있다. 2백 엔을 넣고 버튼만 눌러 놓으면 한아름의 빨래가 얼마 뒤 보송보송 말라 있다. 그런데도 이 아파트 사람들은 이것을 별로 이용하려 하지 않는다. 모두가 철저한 베란다 파들이다. 속 옷은 물론 이불이나 요를 너절너절 내건다.
자신의 안을 좀처럼 남에게 내비치지 않고 또 그것을 미덕으로 하는 사람들이다. 집안을 남에게 보이지 않으려고 커튼을 겹으로 치는 사람들이 어떻게 해서 속옷 등을 거침없이 베란다에 내거는 것일까.
적어도 한국의 경우 중산층 정도의 아파트에만 가도 빨래나 이불을 거침없이 베란다에 내거는 모습은 볼 수 없지 않은가.
그래서인가 일본에서 자주 발생하는 참 희한한 범죄가 있다. 남의 집 빨래에서 여자 팬티만 훔쳐 가는 범죄다. 그것을 몇 백, 몇 천 개씩 훔쳐다 수집(?)한다. 그렇게 훔쳐 온 팬티로 커튼도 해 달고 벽장식도 한 범인이 있었다.
이러한 2중 구조는 또 있다.「가부키」와 다도가 그것이다. 4백년의 전통을 가진 가부키는 과장된 화장·몸짓에 화려하고 요란하고 시끄러운 연극이다. 다도는 그러나 이와 정 반대다.금욕적인 절제와 정한, 그리고 일상사로부터 표백된 한 순간의 삶이다.
그러나 이 상극의 두 문화가 거의 같은 시기에 싹터 일본을 대표하는 정신세계로 자리잡았다. 그리고 지금은 일본을 상징하는 전통문화가 되었다.
밤늦은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가며 늘 만나곤 했다. 드높은 목소리로 역이 떠나갈듯 소리치며 친구들과 헤어질 때의 일본 젊은이들, 그 시끄럽고 요란함이란 가부키의 세계였다. 그러나 차에 오르는 순간 표변한다. 그 움츠리고 앉은 고적한 모습은 마치 세상과 절연한 수도자처럼 변해 있다. 다도의 세계인 것이다. 한 사람의 내면에 어떻게 저다지 상반된 모습이 혼란 없이 정제돼 내재하는 것일까.
도처에서 눈에 띄는 이 일본인의 2중 구조 일본을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마음의 하나로 이 2중 구조를 이해해야 한다. 결코 힐난의 눈으로 혹은 불가사의의 기묘 성으로가 아니라 그러한 특이성이 오늘의 저「은성한 사막」일본에 어떻게 용해되어 있는가를 알기 위해서다. 그렇지 않고 무엇으로 일본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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