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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8의 미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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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6월 초 독일 하일리겐담에서 열린 G8(주요7개국+러시아) 정상회담은 기적이 이뤄졌다는 인상을 남겼다.

G8 정상회담의 이슈를 세 가지로 요약하면 기후 변화, 아프리카, 러시아와 미국의 관계다. 이번 회담에서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은 ‘지구온난화의 주범’에서 ‘기후 변화를 막기 위해 다시 태어난 사람’으로 변신한 것처럼 보였다. 유럽통합을 앞둔 시점에서 부시 대통령이 이처럼 변한 것을 보고 일각에서는 유럽이 세계 정치에서 새로운 역할을 맡게 된 것을 의미한다고 해석했다. G8은 이런 기적이 필요하다. 하지만 진짜로 기적이 일어난 것일까.
미국인은 과거 유럽인들보다 더 종교적이지만, 하일리겐담에서 기적이 일어났다고 믿는 사람은 별로 없어 보인다. 미국인들은 이 정상회담에 관심조차 없었다. 같은 시기에 미국은 오히려 패리스 힐턴이 체포됐다는 소식으로 떠들썩했다. 게다가 미국인들은 부시 대통령을 곧 임기를 마치고 물러날 사람 정도로 여기고 있다. 이 때문에 미국인들은 이 정상회담에서 실제로 결정된 것이 없다고 믿고 있다.

그렇다면 이 회담에서 무엇이 결정됐는가? G8 국가들은 2050년까지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반으로 줄이는 것을 검토하는 쪽으로 의견을 모았다. 이런 합의는 쉽게 얻어지지 않았다. 오랜 시간이 걸린 것은 물론이고 협상 과정도 치열했다. 하지만 우리가 흔히 말하는 ‘검토한다(examine)’ 또는 ‘심각하게 검토한다’는 사실상 ‘미루겠다’는 것과 그리 다르지 않다.

미국 대통령은 정상회담 전이나 회담 중에 숫자가 명시되는 결과물을 남기는 것을 생각지도 않았으며, 아무런 구체적인 언급도 하지 않았다. 따라서 결국 남은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거나 그 결정을 진지하게 미루는 것뿐이다. 사실 국제 회담이라는 건 상당수가 이런 식이다.

안타깝지만 지구온난화에 관한 미국 대통령의 입장을 바꾸기 위해 유럽이 할 수 있는 것은 그리 많지 않다. 이미 앨 고어 전 미 부통령이나 아널드 슈워제네거 캘리포니아 주지사가 부시 대통령에게 이 문제의 심각성을 일깨우기 위해 유럽 어느 나라의 정상보다도 더 많은 노력을 했다. 좀 냉정하게 바라보면 지구온난화 문제에서 미 정부의 입장이 크게 달라진 것도 없다. 미 공화당이나 민주당 의원들은 여전히 주문을 외듯이 같은 말만 되풀이하고 있다. 중국이 안 한다면 미국도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이 입장은 차기 대통령선거 이후에도 변치 않을 것이다.

미국과 중국의 1인당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비교해 보면 문제는 분명해진다. 중국은 미국 다음의, 온실가스 배출 2위국이다. 하지만 인구 대비로 보면 미국보다 훨씬 적다. 미국이 세계 최대의 경제국이자 1인당 온실가스 배출 1위국이라는 사실은 앞으로도 지구온난화 문제 해결이 쉽지 않음을 의미한다.

G8이 기적이 아닌 이유는 기후변화에 관한 합의 때문만은 아니다. G8 정상회담을 앞두고 대외 개발 원조 계획을 발표한 독일은 아프리카에 7억 유로(약 8700억원)를 지원키로 했다. 그러나 아프리카 지원 확대는 이미 2005년 스코틀랜드 G8 정상회담에서 결정된 사항이다. 당시 G8 정상들은 2010년까지 아프리카에 대한 지원 규모를 두 배로 늘리기로 합의했다. 따라서 이번 G8의 아프리카 지원은 화려한 수사에 불과하다.

올해 G8 정상회담의 막은 내렸다. 문제는 11월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열리는 유엔 기후변화회의다. 여러 나라 환경장관이 모여 지구온난화 문제 해법을 논의할 이 자리에서도 서로 견해가 충돌할 것이다. 그때가 되면 G8 하일리겐담 회담에서 정말 놀라운 ‘정치적 기적’이 일어났는지, 아니면 그것이 ‘정치적 기적극’에 불과했는지가 분명해질 것이다.

요슈카 피셔 전 독일 외무장관

정리=이은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