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 2007 한국리그 KB 국민은행 - 느릿하던 초읽기 빨라졌네 아차차 시간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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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시간패는 오직 순발력 떨어지는 노장들에게만 따르는 불행이었다. 그런데 팔팔한 젊은 기사들이 주인공인 KB2007 한국리그에서 사상 처음으로 '시간패'라는 해프닝이 벌어졌다. 화제의 주인공은 제일화재 팀의 두 번째 선수로 나온 김주호 6단. 그는 23일 영남일보 홍민표 5단과의 대결에서 초반의 대불리를 차근차근 만회한 끝에 드디어 필승의 형세를 구축했다. 그런데 김주호는 계시원이 "아홉" 할 때 느릿하게 돌을 들더니 "열" 소리와 함께 황급히 착수했다. 물론 "열"소리가 한발 빨라 시간패가 선언되었다.

다음 수가 아주 빤한 장면이었는데 김주호는 왜 서둘러 착수하지 않았을까.

지금까지 생방송 대국에서 대뜸 "열"을 불러버린 계시원은 한 명도 없었기 때문이다. 사람이 부르는 초읽기는 대개 "아홉" 이후 약간의 인정을 두게 마련이지만 특히 생방송의 경우 여러 가지 복잡한 후유증을 일으킬 수 있기에 속도가 더욱 느려진다. 여기에 습관이 된 프로기사들 중엔 아홉에서도 아예 돌을 집을 생각조차 하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초읽기 관행을 역이용하게 된 것이다.

보기에도 쑥스러운 이런 광경이 계속되자 팬들의 문의와 항의가 이어졌고 바둑 TV 실무진은 "방송이 차질을 빚는 한이 있더라도 초읽기를 엄중하게 한다"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계시원에게도 지시가 떨어졌음은 물론이다.

그런데 이런 사실을 까마득히 모른 김주호 6단은 이날도 버릇처럼 "아홉" 이후에 느릿 느릿 착수하는 여유를 부리다가 "열" 소리에 기겁을 하고 만 것이다.

3승1패의 호성적으로 공동 2위를 달리고 있던 제일화재는 안달훈이 김지석에게 지고 김주호의 시간패에 이어 배준희가 영남일보 주장 이영구에게 패배해 3대 0으로 무너졌다. 제일화재는 이 뒤에 이세돌 9단과 조훈현 9단이 대기하고 있었으니 (영남일보는 손근기와 허영호) 김주호가 시간패만 당하지 않았더라면 영남일보를 꺾고 공동 1위에 오를 수도 있었다. 행운의 승리를 거둔 영남일보는 5연승으로 단독 선두를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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